| 폴란드의 왕이었던 얀3세 소비에스키는 그냥 비엔나 전투 때 활약했던 명장이라고만 알고있었고 그것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날 궁금해져서 백과사전을 살펴보았는데 상당한 군사적 재능에다 많은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이었길래 흥미가 생겨 한번 그를 다루는 책이 있는지 찾아보던중 시드니 대학 도서관에서 그의 전기를 찾게 되었다. 
원래는 폴란드어로 되있는 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나온 시기가 44년도라 은근히 민족적인 감정이 상당히 느껴지는 책이다. 전투도면과 지도들이 몇개 없어서 그점이 좀 불만이었지만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그럭저럭 읽어볼만은 한 책이다. 얀 소비에스키는 번개폭풍이 치는 가운데 올레스코에서 야쿱 소비에스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인 마렉과 함께 주우키에프에서 자라다 아버지에 의해 노보드보르스키에 입학했다. 얼마후 이들은 해외로 보내져 귀족자제들에게 필요한 군사기술과 예절 등을 배웠는데 이때 얀은 토르스텐손, 반 트롬프, 콩데 등과 만남을 가지고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등의 발달된 군사기술들을 익히며 후일 그가 장군으로서 필요한 것들을 익혀나갔다. 하지만 아버지가 죽고 폴란드에서 흐미엘니츠키가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네덜란드에 공부하던 이들은 서둘러 폴란드로 돌아와 귀족자제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자비로 기병전대를 모은 형제는 명예를 져버리고 도망칠 경우 절대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겠다는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전장으로 나갔다. 얀은 얀 카지미에슈 왕이 이끄는 국왕군에서 예지 루보미르스키가 지휘하는 좌익에 배치되어 즈바라즈 전투에서 싸웠고 베레스테츠코 전투에서는 미코우아이 포토츠키의 지휘 아래 형과 함께 우익에서 싸우다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으며 하마터면 타타르족에게 잡힐 뻔 했다. 마렉이 바토흐에서 전사하자 얀은 위대한 세 가문(소비에스키, 다니오비츠, 주우키에프스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왕이 직접 이끄는 즈바니에츠 원정에 동참하기도 했다. 평화협정이 진행되는 동안 칸이 인질을 요구하자 소비에스키는 자진해서 인질로 자원했고 타타르의 진지로 가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다음해 그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기위해 이스탄불로 가는 사절일행에 참가했으며 다음해 러시아와 카자크를 상대로 싸웠고 오흐마투프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내 바르샤바 궁정에서 슬슬 그의 영향력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후일 아내가 되는 14살의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도 이때였다. 그때 상황이 악화되어 흐미엘니츠키는 르부프를 공격했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며 스웨덴은 폴란드 본토에 직접 처들어왔다. 왕과 왕비는 슐레지엔으로 망명했고 소비에스키는 대부분의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에 투항했다. 하지만 루보미르스키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파벨 사피에하 등이 끝까지 왕의 편에 서서 저항하고 스웨덴의 억압이 심해지면서 농민들도 서서히 들고일어나기 시작해 스웨덴군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소비에스키도 다시 왕에게로 돌아서 폴란드를 위해 스웨덴과 싸우는데 최선을 다했다. 저자는 이러한 소비에스키의 행위를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면서 어느정도 옹호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적극적으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그의 투항은 좋은 점도 있었는데 스웨덴의 발달된 전술과 편제를 직접 목격함으로서 많은 가르침을 얻은 것이다. 그는 루보미르스키 휘하에서 종군하며 바르카 전투에서 활약했고 적을 체르스크와 바르샤바 인근까지 추격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스웨덴을 폴란드 밖으로 몰아내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의 활약으로 그는 잃어버렸던 왕의 신뢰를 되찾고 투항으로 인해 받은 불명예를 씻어낼 수 있었다. 추드누프 원정 때 그는 루바르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추드누프에서는 뛰어난 대포배치로 전투를 더욱 수월하게 진행했으며 얀 사피에하가 유능한 야전축성으로 셰레메티에프의 군대를 견제하는 사이 루보미르스키를 따라 기동작전을 펼쳐 슬로보디슈체 전투에서 좌익을 지휘하여 보흐단의 아들, 예쉬 흐미엘니츠키의 카자크군과 싸웠다. 소비에스키는 카자크군을 밀어내 본군이 진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열었고 숲에서 매복하고 있던 타타르군이 적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추드누프에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보라틴스키에 대항하는 독립분견대를 지휘했다. 포토츠키와 루보미르스키 등의 위대한 원수(Hetman)들 밑에서 싸우는 것은 그에게 큰 경험과 교훈을 줬으며 이것은 후일 그가 명장으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다. 이 전역이 끝난뒤 사랑하는 여인으로 인해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게 된다. 소비에스키는 마리시엥카(마리 카지미르)와 결혼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후원자인 루드비카 마리아 왕비는 소비에스키보다 더 세력이 큰 얀 자모이스키의 지원을 얻기 위해 결국 그와 마리시엥카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결혼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고 마리시엥카가 파리로 가출(?)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자 옛 감정을 되살린 소비에스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한 왕비가 조종하는 마리시엥카의 말을 듣기 시작해 정치판에서 왕비의 일파가 되었고 그동안 왕이 이끄는 러시아원정에 대동하기도 했다. 왕비의 반대파였던 루보미르스키의 방해로 원정을 일찍 끝내게 되자 왕비는 사사건건 자신을 방해하는 루보미르스키를 직접 세임에서 반역죄로 기소하기로 했다. 루보미르스키는 슐레지엔으로 망명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소비에스키의 지원을 바란 왕비는 루보미르스키의 빈자리에 그를 대신 앉히려고 했지만 소비에스키는 망설였다. 그때 자모이스키가 죽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왕비는 원수(marshal)직에 앉는다면 마리시엥카와 결혼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여자에 미친 소비에스키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루보미르스키는 정적들, 그중에서도 소비에스키의 영지를 제일 먼저 약탈했고 소비에스키의 인기는 추락했으며 젠트리들은 그를 적으로 여겼다. 차르니에츠키가 죽자 소비에스키는 대원수로 승진했지만 천상 군인이었던 그는 궁중음모에 파묻히고 옛 상관이자 스승이나 다름없는 루보미르스키와 대적하는 것에 괴로워했으며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전쟁에 아무런 열정도 없던 그는 왕의 명령만을 순순히 따를 뿐이었고 마트비 전투에서 왕이 자신의 경고를 무시했다가 패하자 홀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는데도 자기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트비 전투는 내전의 끝이었는데 이 전투로 양측간에 협의가 이뤄졌고 루보미르스키는 다시 궁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왕과 대신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껴않으며 인사했지만 소비에스키에게는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았는데 그것이 그를 용서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비난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왕비는 여전히 프랑스인을 다음왕으로 세울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적이었던 루보미르스키와 손을 잡게 되었다. 그녀는 소비에스키에게 주었던 직위와 특권들을 빼았아 다시 루보미르스키에게 돌려주려 했고 마리시엥카도 프랑스궁정으로 가는 것을 권했다. 루이14세는 소비에스키에게 편지를 써 만약 그가 프랑스에 오기를 원한다면 프랑스의 원수로 임명하고 성령기사단에 입단시켜줄 것을 약속했다. 정치와 궁중암투에 환멸을 느낀 소비에스키는 이 모든 것을 떠나 외국에서 새 삶을 살 준비가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1667년 1월과 5월에 루보미르스키와 왕비가 잇따라 죽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음모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보미르스키 사태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 이번에는 외부에서 또다시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왕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마호메트 대신 아딜 기에레이가 투르크에 의해 칸이 된 것이다. 카자크의 지도자 피오트르 도로솅코는 폴란드의 내분을 이용하여 새로운 흐미엘니츠키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폴란드와 러시아가 협상을 시작하자 이들이 힘을 합쳐 자신들을 대적할 것을 두려워한 도로솅코와 아딜은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해왔다. 이 상황에서도 젠트리와 귀족들은 정치투쟁에만 골몰했고 지난 전쟁에서 봉급을 받지 못한 군인들은 요지부동이었으며 세임은 군대를 줄이기까지 했다. 소비에스키만이 위기를 느끼며 이 모든 상황들을 온갖 어려움을 헤쳐가며 해결해야만 했다. 국가에서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자비를 들여 군대를 양성하고 봉급을 줬으며 병사들을 설득하여 다시 폴란드를 위해 싸우게 만들었고 또한 자포로제 카자크들과 협상하여 타타르군이 떠나는 즉시 비어버린 크리미아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적의 숫자는 십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지만 타타르족의 습성을 잘 알고있는 그는 군대를 쪼개 타타르의 약탈원정대(Tschamboul)가 도착할만한 곳에 미리 주둔시켜 약탈을 방해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 당한 타타르는 처음에는 소비에스키가 대군을 거느린 줄 알았지만 탈취한 서신을 통해 적군의 숫자가 적은 것을 알아채고는 다시 진군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비에스키의 영지인 포모샤니를 약탈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나오게 만들어 숫적인 우위를 이용해 적을 처부순 다음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폴란드를 짓밟을 생각이었다. 소비에스키가 포다이체로 군을 집결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서둘러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소비에스키의 뛰어난 병력배치로 두 강 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해 공격을 시도했다가 큰 피해만 입었고 마초는 모두 소비한데다 자포로제 카자크들이 크리미아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타타르군은 급히 평화협정을 맺은 뒤 돌아가게 되었다. 왕은 소비에스키를 돕기위해 원군을 보냈지만 전투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갔다. 군대는 동영에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뒤 아들인 야쿱이 태어나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귀족들과 권력투쟁 중이던 왕은 소비에스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바르샤바로 초대했는데 그곳에서 성대한 개선식이 치뤄졌다. 세임에서 여전히 다음 왕위후보를 앞두고 왕과 귀족들이 다투고 있을 때 소비에스키는 타타르와의 전쟁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고 이 연설로 젠트리와 귀족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폭발했다. 왕과 세임의 신뢰를 얻은 그에게는 국가의 모든 군사력을 지휘할 수 있는 사상 유례없는 전권이 주어졌고 나라는 다음 왕위후보에 대해 그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소비에스키는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채 정치에 대한 것은 마리시엥카가 행사하게 된다. 왕이 퇴위하자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정치판은 더욱 투쟁이 심해졌고 드 콩데와 드 뇌뷔르를 미는 프랑스파와 로렌의 카를을 미는 오스트리아파는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다가 젠트리의 지지로 미하우 비스니오비에츠키가 왕으로 선출되었고 다가오는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전투적인 왕을 기다리던 소비에스키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무튼 대관식이 끝나자 소비에스키는 카자크들로 인해 불안한 동부전선으로 가서 그곳에만 집중했지만 정치판은 그런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타타르와 내통하고 국내질서를 어지럽히려 한다는 모함이 그를 위태롭게 하자 그를 지지하는 군대가 들고일어나 세임은 마침내 군대의 요구조건을 들어줬고 소비에스키의 조카인 오스트로흐스카와 디미트르 비스니오비에츠키가 결혼함으로서 왕과의 화해도 이뤄졌다. 한편 도로솅코는 라이벌을 물리친 뒤 점점 폴란드에 대한 태도가 오만불손해졌고 술탄에 의해 새로 칸이 된 셀림 기에레이는 술탄의 명령으로 도로솅코를 지원하여 함께 폴란드를 침공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지도자들은 정치투쟁에만 바빠 여기에는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고 소비에스키만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지원도 받지 못한채 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소비에스키는 지난번과 비슷한 방법으로 군대를 나눠 적의 분견대들을 막은 뒤 보흐 강가에서 기병돌격으로 야습을 감행해 놀란 타타르군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얼마간의 추격 뒤 카자크들의 본거지인 우크라이나로 처들어갔다.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브라추아프를 함락시키고 상당한 영토를 정복한 소비에스키는 증원이 필요했지만 정부에서 보내준 원군은 정치투쟁 덕에 오는 도중 모두 돌아가버리고 최소 그는 지금 점령한 만큼이라도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하넹코에게 모두 넘겨주고 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카자크와 타타르를 막은 사람은 소비에스키였지만 공교롭게도 아무것도 하지않은 왕이 모든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내분으로 소비에스키의 성공을 활용하지 못하는 동안, 전열을 재정비한 도로솅코는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군 수비대를 공격했고 얼마뒤에는 투르크군이 본격적으로 다뉴브강을 넘어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왕과 귀족들은 여전히 정신 못차린채 정치투쟁에만 전념했고 소비에스키만이 어떻게든 군대를 늘리고 나라가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애를 쓰는 형국이었다. 부차츠에서 양국의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타타르의 약탈원정은 각지에서 난장판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소비에스키는 뛰어난 기동과 전술로 잇따라 타타르를 연전연패시켜 그들이 약탈한 것을 도로 빼았고 나라를 약탈원정에서부터 해방시켰다. 하지만 정적들과의 싸움을 적국과의 싸움보다 더 중요시한 왕은 영토를 투르크에 할양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는 봉신의 지위가 되는 것을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을 했다. 그는 군사소집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의 목적은 투르크와의 전쟁이 아닌 정적들을 무력으로 누르는 것이었고 여기에 말려들어간 소비에스키는 그에 반대하는 새로운 동맹을 만들어 대치했다. 그러나 부차츠 조약에 관한 일이 알려지면서 민심은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고 소비에스키는 소원대로 자신의 지휘아래 전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투르크는 조약의 승인과 전쟁 중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해왔고 곧 "술탄의 호랑이"라 불리는 카플란 파샤가 군대를 이끌고 처들어왔다. 이들의 숫자는 전년보다 더 적었는데 소비에스키에게 된통 당한 타타르는 크리미아에 그대로 머물렀고 카플란 파샤는 "레히스탄의 사자"라고 불리는 소비에스키와 별로 칼을 맞대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진군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호침에서 소비에스키와 맞서게 되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선두에서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등의 용기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고 사령관인 후세인 파샤가 도망간 투르크군은 솔리만의 공격실패와 폴란드군의 기병돌격을 통한 반격으로 대패하여 패주하기 시작했다. 이 전투로 마음을 놓은 리투아니아군이 회군하고 병사들이 계속 탈영하여 군대의 숫자는 줄어들었지만 소비에스키는 폴란드 밖 야시까지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전쟁을 적의 영토에서 벌일 계획이었다. 그때 아프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본국의 혼란을 염려하여 소비에스키는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 정계는 새로운 왕의 선출을 놓고 다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파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파의 우두머리로서 소비에스키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장군인 드 콩데를 지지했지만 프랑스는 드 뇌뷔르만을 후보로 내세울 뿐이었다. 오스트리아파는 소비에스키의 정적인 리투아니아 원수인 파츠가 중심이었는데 이들은 프랑스파처럼 세력이 결집되지도 않았고 내세울 마땅한 후보도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소비에스키를 반대했다. 그러던중 소비에스키 자신이 직접 왕이 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나왔고 소비에스키는 끝까지 드 콩데를 지지했지만 막상 프랑스가 그를 내세우지 않자 결국 그 자신이 입후보하여 많은 인기하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 얀3세가 된 그는 전쟁을 위해 대관식까지 뒤로 미루며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다시 투르크의 위협으로 전화가 닥처오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카자크들과 함께 거점들을 확보했지만 투르크군이 다뉴브를 넘어오자 차르는 서둘러 군대를 후퇴시키고 폴란드에 빨리 원병을 요청했다. 왕은 우크라이나로 진군하여 연전연승한 뒤 국경을 넘어 투르크 영내로 처들어갈 작전을 세웠지만 반대파인 파츠가 지병을 이유로 출전하지 않아 결국 군대를 동영시킨 뒤 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외교문제들 때문에 그는 야보루프 조약을 맺었고 프랑스의 지원을 통해 자신의 왕조를 창시할 생각을 품었다. 
파츠의 직위는 그대로 유지한 채 대신 리투아니아군의 지휘권을 라지비우에게 일임한 왕은 우크라이나를 다시 침략한 타타르와 투르크군을 상대하기 위해 다시 출전했다. 타타르는 폴란드 수비대를 공격했다가 크게 당했지만 술탄의 사위 이브라힘 쉬쉬만(뚱땡이라는 뜻-_-;;;)이 드니에스테르를 넘어왔기 때문에 다시 공세에 나설 계획이었다. 왕은 르부프에 군대를 집결시켰는데 칸은 모든 폴란드군이 이곳에 집결하기전에 모든 힘을 다해 공격하여 적을 무찌를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타타르는 르부프 전투에서 크게 대패했고 왕은 투르크군을 상대하기 위해 트렘보푸아에 있는 쉬쉬만에게로 다가갔지만 타타르의 패배소식을 들은 그는 감히 레히스탄의 사자와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서둘러 폴란드 밖으로 빠져나갔다. 폴란드로 돌아온 왕은 그동안 미뤄왔던 대관식을 치르고 자신이 겸임했던 대원수직을 친구인 야브오노프스키에게 준 뒤 군비증강을 시도했지만 정적들의 반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타타르와 투르크는 다시 처들어왔는데 얼마 뒤 시르다르의 자리는 쉬쉬만에서 이브라힘 샤이탄으로 교체되고 타타르는 약탈원정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왕이 이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주라프노에 당도했을 때 할리치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돌하로 가서 히에로님 루보미르스키에게 기병대로 하여금 보이닐루프에서 투르크군에게 기습을 하도록 했다. 투르크군은 본군의 진지가 있는 할리치까지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투르크와 타타르 본군은 루보미르스키에게 반격을 가했고 그는 왕이 있는 돌하까지 후퇴했다. 왕은 공격해오는 타타르군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며 주라프노까지 후퇴했고 가뭄으로 인해 강이 말라붙어 왕이 준비한 방어진이 제 구실을 못하는 상황에서 타타르는 스비에차강을 건너 총공격을 가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파샤가 도착하자 다시 총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투는 참호와 포격전으로 흘러갔고 얼마 뒤 손실이 심한데다 전세가 도저히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브라힘은 결국 평화협상을 벌여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폴란드에 돌려주고 나머지는 양국간 정식외교사절들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로 폴란드의 위신은 높아졌고 왕의 명성도 더 널리 퍼졌지만 그의 계획과 작전을 방해하는데 열심이었던 정적들은 그로인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계획들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 모두 전가하고 그를 비판하는데도 열심이었다. 투르크와의 평화협정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는 스웨덴을 이용해 황제의 동맹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스웨덴은 폴란드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왕 역시 프로이센 공국을 되찾기를 원했기 때문에 전쟁준비에 들어갔으나 스웨덴의 늑장으로 결국 스웨덴은 패배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황제는 폴란드에서 내분을 일으켜 왕이 프랑스와 협력하지 못하도록 친오스트리아파를 지원했고 투르크에서는 새로운 대재상(Grand Vizir)이 된 카라 무스타파의 강경책으로 다시 전쟁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루이14세가 왕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오스트리아와 멋대로 협상을 체결하고 자국내 친오스트리아파가 반투르크적 성향을 드러내자 왕의 위치는 미묘하게 변했다. 친프랑스 정책을 고수하던 왕은 점점 투르크와의 전쟁을 위해 친오스트리아와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반투르크 동맹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제안받은 나라들은 미적거리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나라는 없었다. 왕은 자신의 왕조를 창설하기 위해 아들인 야쿱 왕자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리투아니아의 유력한 가문의 후계자 루드비카 카롤리나 라지비우를 며느리로 맞아들일 계획을 세웠지만 그녀의 보호자인 선제후는 재빨리 자신의 아들 루트비히와 결혼을 시켰다. 분노한 세임에서 그녀의 영지를 압수할 것을 주장했지만 프랑스의 책략으로 친프랑스파의 수장 모르슈틴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등 내분으로 왕은 투르크와의 전쟁에 필요한 재무장준비를 하지 못한채 세임은 해산되었다. 한편 투르크는 러시아와 평화협정을 맺고 모든 전력을 오스트리아로 집중할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의 조종을 받는 모르슈틴은 왕을 물러나게할 음모를 꾸미고 왕의 친구인 야브오노프스키를 다음왕으로 내세울 생각이었지만 왕은 오히려 정적들에게 혜택을 베풀며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고 모르슈틴을 협박하여 그가 자신에게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내정을 정리한 왕은 오스트리아와 조약을 맺고 투르크와 전쟁이 터질 경우 서로 도와주기로 하여 마침내 왕은 전쟁에 필요한 것들을 갖출 수 있었다.
마침내 카라 무스타파는 수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폴란드가 절대 오스트리아를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폴란드에 대한 경계와 정찰도 제대로 하지 않은채 비엔나를 포위했는데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왕은 군대를 이끌고 황제를 돕기위해 출병한 다른 독일제후 연합군과 합류했는데(오스트리아가 내세운 왕위후보였던 카를이 소비에스키 이전의 총사령관이었음) 이들 중 소비에스키의 영향력과 위치가 가장 높았기 때문에 그가 총사령관이 되어 비엔나를 포위하고 있는 투르크군에게 다가갔다. 소비에스키의 폴란드군은 연합군의 우익에서 공격에 나섰고 치열한 전투 끝에 투르크군은 밀려나 결국 카라 무스타파는 패배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지휘권을 부하에게 넘기고 자기만 홀로 도망쳤다. 비엔나의 포위가 풀리자 전투에서 아무것도 한일이 없던 황제는 자기가 비엔나구원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장군들에게 아무도 자기보다 먼저 비엔나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전달이 너무 늦게 된탓에 소비에스키는 구원자로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황제는 비엔나를 돕기위해 온 원군들을 푸대접했으며 그들에게 보급과 숙영지도 제공하지 않았고 죽은 병사들을 공동묘지에 묻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폴란드 병사들이 죽어갔고 황제의 태도에 분노한 많은 독일제후들이 본국으로 되돌아갔지만 왕은 후퇴하는 투르크군을 계속 추격하여 그란으로 진군해갔다.

파르카니에 있던 투르크군은 폴란드군이 다가오자 요새 밖으로 나가 전투를 벌였는데 이들의 공격에 우익이 무너지자 왕은 전열을 다시 재정비하려고 애썼지만 졸증이 찾아와 제대로 지휘를 할 수 없었고 그를 따라온 독일군은 무적이라 알려진 그의 패배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다음날 벌어진 두번째 전투에서 폴란드군은 승리했고 투르크군은 파르카니에서 겅 건너편의 그란으로 건너가려다 많은 수가 익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이상의 전진은 폴란드군이 그동안 입은 피해와 보급문제, 황제와 독일제후들의 비협조로 더이상 진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비엔나 구원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엔나 구원으로 많은 명성을 얻은 소비에스키는 폴란드의 영향력을 흑해까지 확산하고 투르크의 속국인 몰다비아와 트란실바니아 등에 대한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기독교국가들의 연합을 추진하고 국내정치에서 가장 큰 적인 사피에하 가문의 방해를 무릅쓰며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적들의 방해와 부하들의 무능 밑 주변국들의 비협조로 추진하는 원정들은 실패했으며 대동맹 전쟁 때 국제적으로 고립된 루이14세는 소비에스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이에 실패하자 왕의 정적들이 계획한 쿠데타음모를 지원하기도 했다. 러시아와의 협상은 결과적으로 키예프만 넘겨준 채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고 결국 1691년 원정에서 타타르에 대한 작은 승리를 거뒀지만 목표달성에 실패한 이후 병들고 늙은 왕은 더이상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킬 행동을 할만한 기력과 열정을 잃어버렸다. 마지막 군사원정 후 그는 사실상 정치와 군사, 외교에서 거의 손을 땐채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에만 머물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했지만 가족문제는 끝까지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왕조를 창시할 생각으로 폴란드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놓여있는 황제를 설득하여 황제는 마지못해 처제를 장남 야쿱과 결혼시켰다. 그뒤 야쿱은 친오스트리아파와 어울리며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았는데 프랑스인이었던 마리시엥카는 여기에 반발하여 둘째 아들인 베네딕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가족들간의 반목과 불화는 말년을 편하게 보내려던 왕을 오히려 더 근심하게 만들었다. 왕은 결국 병이 악화되어 죽었는데 마리시엥카가 관을 호송하여 바르샤바로 들어가려고 하자 야쿱은 어머니의 입성을 막았고 마리시엥카는 이에 울부짖으며 아버지의 시신을 박대하는 아들을 개탄하는 등 소비에스키는 죽어서까지도 가족들의 불화에 시달려야만 했다. 지난번 빌라르와 수보로프의 전기를 요약해서 올릴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억심없이 처음에는 좀 자세히 적다가 overtaken by 귀차니즘되어 내용이 점점 간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_- 아무튼 이 책은 지도가 좀 부족하다는 점만 빼면 소비에스키의 생애를 아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전쟁사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는데 지도가 없어 대체 뭐가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부분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수준이다. 저자는 소비에스키를 상당히 띄우는데 그가 자신만의 왕조를 세우려한 것을 빼고는 책만 보면 그는 거의 막장인 폴란드 정치판과 치사하고 비열한 주변국들의 음모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저자의 민족감정을 제하고도 폴란드의 막장정치판은 상당히 심각해보이기는 한다. 일단 이 책은 내가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소비에스키의 전기이다. 인터넷을 좀 뒤져보니 이것 말고도 소비에스키의 전기가 몇권 더 있는 듯도 싶었지만 19세기에 나온 것들인데다 책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소비에스키의 다른 전기는 안읽어봐서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일단 많은 고통을 당한 영웅 소비에스키의 생애를 알기에는 좋은 책인 것 같다. 저자가 민족감정에 치우친 점이 없잖아 있어 객관적인 소비에스키의 평가가 어떤지 알기 어렵지만 저자의 뉘앙스에 넘어가지 않고 사실들만 집중한다면 괜찮은 책이라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