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논의는 북미대륙에 식민지가 건설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시작하어 17세기 후반에는 그것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졌다. 1690년대에,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는 원료공급원, 해상세력으로서 영국(잉글랜드) 국력의 원천, 그리고 불필요한 인력의 정착지 등으로 규정되었다. 18세기가 지나면서 영국과 식민지 사이의 무역이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식민지는 본국의 상품시장으로서 새롭게 각인되기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7년 전쟁 기간 중에, 존 더글러스(John Doglas)는 "우리가 이전에 유럽과 레반트(동지중해) 지역에서 교역 거점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업이 더없이 활발하고, 우리 제품에 대한 수요가 더 늘었고, 우리 해운업이 엄청나게 성장했다면, 이것이 우리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덕택이 아니겠는가, 전쟁으로 영국이 획득한 캐나다와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 식민지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캐나다를 택해야 할 것" 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이러한 캐나다파(?)는 서인도 제도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상인, 이를테면 서인도제도파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서인도보다는 북미식민지가 더 중요하다니까...)
서인도제도파는 캐나다가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훨씬 불리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캐나다는 영국령 서인도에 대한 목재, 식품 공급원으로서 부족하고, 본국을 위한 원료 공급원으로서도 역시 부족하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반면 캐나다파는 그곳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 캐나다의 경제적 잠재력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캐나다파와 서인도제도파 둘 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7년 전쟁 직후에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 이유는 영국의 상업과 제조업이 다른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반면에 북아메리카 시장은 성장일로에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욕 출신의 런던상인 니콜라스 레이는 식민지를 '권력의 원천'이고 '인생의 축복'이라 찬양했다. 반면, 유럽 시장에서 영국의 처지는 불안정했다. 1766년 익명의 저자는 "이 순간 우리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도 의지할 만한 다른 어떤 무역로가 없다. 프랑스인들은 유럽의 모든 항구에서 우리와 경쟁하거나 우리보다 싸게 팔고 있다"고 한탄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도 본국인들과 생각이 같았다. 대니얼 듀레이니는 "모국의 복지뿐만 아니라 독립된 왕국으로서의 존재도 무역과 항해에 달려 있는데, 이제까지 그것은 식민지와의 교류에 의존하고 있다" 고 말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문제는 영국이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의 경제와 해군력에 이익이 되도록 충분히 활용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심이 증폭되었던 계기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7년 전쟁 기간동안에 적국인 프랑스, 에스파냐의 서인도 식민지과 밀무역을 했던 사실에 있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의 경제활동에 좀 더 엄격한 통제를 원했던 무역부는 전쟁 중 작성된 보고서에서 "식민지들이 매년 150여척의 배를 서인도의 외국 항구들에 보내왔다"고 보고했다.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대 피트) 역시 같은 문제를 지적하면서 "식민지에 있는 국왕의 신민들이 계속하고 있는 불법적이고 매우 치명적인 교역 때문에 서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신속하게 종결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저것들 땜시 전쟁을 끌어 버렸어...)
7년 전쟁 후에도, 식민지의 외부교역은 영국 정계의 포커스였다. 수상 조지 그렌빌의 비서였던 토마스 웨이틀리는 "식민지인들이 7년전쟁 동안 지출했던 비용을 영국으로부터 되돌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밖의 국가나 식민지와 활발하게 교역함으로써 그들의 전시 부채를 250만 파운드에서 80만 파운드로 줄일 수 있었다" 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결국 영국이 전쟁으로 얻은 것은 엄청난 부채밖에 없다는 불만으로 이어졌고, 본국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중상주의적 통제를 가하지 않는 한 식민지는 영국경제에 충분히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북아메리카 식민지나 영국 이외의 국가나 그들의 식민지와 광범위하게 무역하고 있다는 것은 7년전쟁 발발 이전에도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경제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7년전쟁이 발발하기 한참 전부터 있어 왔다. 7년전쟁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사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독자적인 무역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무역은 영국과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이 영국 정치가들과 관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즉, 불법무역은 경제적인 관점보다도 정치적인 식민지 통제의 관점에서 인식되었다. 토마스 웨이틀리가 북아메리카의 무역이 항해법의 심각한 위반 행위라고 비난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불법 무역 때문에 식민지들이 영국과의 관계를 깨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심이 나타나고 있는데, 영국과 식민지들의 관계는 항해법이 무시될 때마다 사실상 이미 깨진 것이다. 그들 무역의 매우 큰 부분이 이런 식으로 정상적인 경로에서 이탈하고 있을 때, 그 식민지들은 영국의 식민지들이 아니라 그들이 교역하는 국가들의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식민지에 대한 본국의 통제를 역설하는 주장은 인지세법 논쟁 이전까지는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에게 그저 경제적인 주장일 뿐이었다. 식민지 사람들은 항해법을 어기면서 외국과 교역하는 것이 영국 경제에 유리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로드아일랜드 지사 스티븐 홉킨스는 이렇게 말한다.
"불법 무역이 불가피한 이유는 자연적 조건이다. 북아메리카의 북부 식민지들은 토지와 기후 조건이 설탕, 담배, 인디고, 쌀과 같은 농산품 경작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럼, 목재, 생선 등의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서인도와 영국의 식민지들이 북아메리카 북부 식민지들의 수출품들을 모두 소비할 수 없었던 반면에, 북부 식민지들은 본국의 공산품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햐 한다. 이를 위해서 식민지 사람들은 결국 외국이나 외국의 식민지에 대한 수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니네 제품 사려면 돈을 벌어야 되는데 너네 수요는 우리 공급을 못 채우잖아...지금 이대로 가는게 윈윈이여.)
식민지 사람들이 불법무역을 옹호한 논리들은 본국의 지식인들과 상인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어느 런던 상인'이라 부른 익명의 저자는 아메리카 식민지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교역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서인도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물품도 외국에 재수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다면 영국령 서인도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본국 제품을 계속 수입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식민지에게 경제적 통제를 가하는 주장이 영국과 식민지를 폐쇄된 경제 단위로 이해했던 반면에, 식민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양자교역에서 벗어나 외국까지 포함하는 다자간 무역을 통해 경제적 잠재력을 극대화하자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주의가 설득력을 갖게 된 계기는 18세기 중반 이후로 영국의 무역구조가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자유주의자 토마스 파우놀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식민지들이 처음 정착되었을 때와 매우 다른 현재의 상황들을 검토하고 고려하지 않고 항해법 등을 식민지 무역에 엄격히 적용하려 한다면, 우리는 식민지들을 그저 그런 플랜테이션으로 되돌려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식민지들은 플랜테이션화에 반발해 자체적인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식민지들이 자립경제의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것은 영국과 식민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제조업은 식민지의 상황에 부적합하고, 심지어 영국과 식민지를 연결하는 경제적인 끈을 그들이 끊어버릴 수 있다. 이리하여 식민지가 경제적으로 자립한다면 식민지의 정치적 독립도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제조업 육성하면 쟤네들 독립할 수도 있어...그냥 분업구조로 가자니까.) 식민지가 공산품 생산에도 관심을 기울여 경쟁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영국의 대서양 무역구조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동시에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독립하기 위한 조건이 식민지의 제조업 경쟁력 향상이었다. 식민지의 경제적 역할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얼마든지 재정립될 수 있었다. 이는 19세기에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이 당시 옛 식민지였던 미국을 바라볼 때, 그리고 남북전쟁을 바라볼 때 느꼈던 감정이기도 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식민지 제조업 육성 가능성에 대한 본국 사람들의 우려를 인지세법 논쟁 중에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아메리카인들은 영국상품의 수입금지를 결의하면서 본국의 상공업자들이 가장 우려하던 시장의 상실을 내세워서 영국을 압박했다. 본국 상공업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식민지 시장의 영구적인 상실 가능성이었다. 아메리카인들이 점차 영국의 상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반향은 본국에서 즉시 나타났다. 식민지 제조업의 발전은 비단 북부지방의 식민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2편에서 언급한 '어느 런던 상인'은 식민지 제조업이 북부보다 영국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부 식민지에게도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무역의 통제로 식민지인들이 피해를 입으면 남부 플랜테이션 지주들이 영국 상인들에게 대금을 결제하지 못할 것이고, 이 때문에 본국 상인들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의 공급을 해 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남부의 지주들은 노예들을 제조업에 쓸 것이다." 식민지 문제에 정통했던 상인들에게는, 식민지의 경제 상황이 본국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메리카 식민지와 서인도제도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은 당시 식민지 상황을 가장 정확히, 그리고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정보통이었다. 그들은 비록 식민지의 경제상황에 대한 통계자료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식민지 경제의 발전상과 이것이 영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의 관점에서, 인지세법은 7년전쟁 이전 영국의 상황과 명백히 대비되었다. 본국의 무역 통제는 오히려 영국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식민지의 경제는 18세기에 꾸준히 성장해 왔으며, 이렇게 늘어난 식민지의 소비가 영국 경제 성장의 동력이라는 것을 전제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의 중요성은 영국의 경제를 꾸준히 숨쉬게 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세금(인지세법 포함)도 우리의 교역과 경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위 상인들의 주장은 팸플릿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여론을 형성했고, 결국 인지세법은 폐지되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당파의 갈등이나 사익을 초월한 정보제공자라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본국인들이 식민지에 대해 점점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스턴 차 사건에 의해 더욱 분명해졌다. 본국인들은 보스턴 시민들이 사유재산을 침범한 것에 경악했고, 그들을 비난하엿다. 그리고 본국 의회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식민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는 여론이 대두하였다. 전쟁을 통해서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여 힘들여 쌓아 온 우위가 식민지인들의 도전에 의해 흔들린다면, 곧 영국이 그동안 누려 왔던 경제상의 이익도 모조리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보스턴 차 사건은 영국인들의 여론을 단번에 바꾸어 버렸다. 피트가 은퇴한 뒤, 그의 유화책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식민지 무역에 종사하는 영국의 상공업자들은 본국에서 대두하는 강경론을 우려했다. 강경론은 식민지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하는 상인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정치활동이나 정치적 발언에 신중해져야만 했다. 미국독립전쟁 직전에 하원에 제출된 청원에서 그들은 정치적인 입장 없이 영국 무역의 상태와 분쟁의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대신 상인들은 영국의 상업적 기원을 강조했다. 상인 리처드 글로버는 "영국의 체제는 상업적인 것이고, 그 힘과 자원은 모두 교역으로서 비롯된다...이 단단한 바탕 위에서 조사가 이루어지게 하자. 제조업과 교역을 통해 경쟁하는 모든 근대 국가들 사이에서 우리를 이토록 높은 위치에 올려놓은, 우리들에게 정해진, 운명에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 이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교역이 식민지에 대한 의회의 권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돌려서 말한 것이다.
상인들은 본국과 식민지 간의 분쟁으로 단기적인 무역손실에만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료공급원과 상품시장 확보를 위해 일시적인 출혈은 감수해야 한다는 강경파의 주장에 대해, 영국 정부는 더 이상 강제적으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통제할 수 없다고 반론했다. 설령 영국 정부가 당장에 식민지인들의 도전을 힘으로 누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은 권위는 유지하기 힘들다. 차라리 지금처럼 식민지와 정치적 갈등 없이 식민지의 경제적 잠재력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식민지인들이 부유해질수록 영국 상품의 소비가 늘어나고, 관세 수입 또한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식민지인들과 다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와의 모든 화해의 노력이 실패하고 전쟁이 시작되지 영국 경제 시스템에 대한 논쟁 역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주제는 전쟁의 경제적 결과로, 교역의 중단으로 인한 상공업자의 피해였다. 어떤 논지들은 상업적인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그들을 위해 영국이 쏟아부었던 자본과 자원을 반란으로 되갚았다는 논리와 연결되었다. 식민지인들의 이러한 배신은 식민지 자체에 대한 경제적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의 친구였던 존 로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광범위한 식민지 무역이 영국의 힘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식민지를 세우고 자기 뱃속에서 실을 뽑아 거미줄을 짜는 대신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부와 재주를 이용하고 좀 더 광범위한 상업을 육성하면 국력은 더 강대해지지 않았을까 정말 의심할 만 하다 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하면서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회의는 어느 정도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독립전쟁은 식민지 무용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이 나라는 더 행복했을 것이고, 아메리카에 썼던 돈이면 지금 반란 중인 식민지들에 영국이 수출하는 모든 제조업 제품들을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무역의 재정수입을 합쳐도 이 나라의 연 수입의 절반도 안 될 것이다" 라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적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한 가지 견해는 전쟁이 영국 경제에 실제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식민지 대리인을 지냈던 직물상 이즈라엘 모우디트는 유럽 등지의 다른 시장에서 영국 제품의 소비가 늘어나 북아메리카 시장의 상실은 벌충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국령 서인도 제도는 북아메리카 없이도 영국과의 교역을 통해 훌륭히 견뎌내고 있기 때문에 경제상의 피해는 오히려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받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북아메리카 무용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식민지가 모든 유럽 국가들에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결국 본국 상인들이 과거에 누렸던 모든 이점들을 경쟁국 상인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반론했다. 그 때가 되면, 식민지인들이 모국과의 교역을 금지함으로써 본국에 악영향을 줄 것이었다. 그러면서 "북아메리카가 중요하지 않다면 왜 지금 우리가 무장을 강조하는가" 라는 논리로 식민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새러토가 전투(1777년 9월), 그리고 식민지와 프랑스의 동맹 체결(1778년)은 이러한 비관적인 견해들이 더 빈번하게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하원 의원은 전쟁이 결국 식민지의 독립으로 끝난다면 앞으로 엄청난 수의 본국인들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할 것이고, 서인도의 식민지가 상실되며, 궁극적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경쟁국이 탄생한다는 것을 경계하여 식민지인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고 교역과 상업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발언했다. 재미있는 것은, 북아메리카와의 분쟁을 거울삼아 아일랜드에 대한 입장도 수정하여 북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도 완전한 자치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요크타운의 대패(1781년)는 북아메리카의 독립을 기정사실화했고, 모든 대안들의 실현가능성은 이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제 본국의 관심은 영국이 신생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수립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영국은 이 전쟁의 피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이 무렵 스코틀랜드의 어느 상인은 "아메리카의 독립이 영국의 무역, 제조업, 해운업의 손실이나 파멸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으나, 문제는 영국이 신생국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이러한 낙관적인 견해를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였다. 여기에는 영국과 신생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또한 영국령 서인도와 신생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아메리카 북부 지역이 영국의 서인도 식민지와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생국 미국은 이 지역에서 자국의 세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 명백했다. 이 때문에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미국인들의 교역권을 인정하는 문제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의 미국인들의 교역권 인정에 대한 논쟁은 1783년 하원에 제출된 미국교역법안에서 '미국의 선박은 미국의 상품들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다'고 명시한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셰필드 백작이 '미국과의 상업에 대한 고찰'이라는 저서를 출간하면서 논쟁은 점화되었다. (셰필드의 저서는 당시 6판까지 출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셰필드는 서인도 제도의 문제는 상업과 경제의 차원이 아니라 방어와 제해권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이 지역에서 식민지를 장차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식민지의 보호는 영국의 우월한 해군만이 보장해줄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에 교역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은 미국 해군과 제해권의 강화를 도와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식민지 방어를 위해서는 미국에 무역상의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또한 그는 영국이 미국에 값싸고 매력적인 상품들을 공급할 수 있는 이상, 영국은 굳이 미국에 매달릴 필요 없이 국내 시장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년전쟁 기간부터 의회에서도 제기되었던 문제는 반란 식민지들 이외에 영국에 이렇다할 상품시장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셰필드는 이를 반박하여 영국의 제조업과 국내 시장은 탄탄한 상태라는 논지를 폈다.

(이젠 국내로 눈을 돌리자능. 국내시장 충분히 성장했다능. 미국만이 시장인 건 아니라능.)
하원에서 미국교역법안이 결국 통과되지 못한 것에는 셰필드의 영향이 컸다. 미국교역법안이 통과되지 못하자 서인도제도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이해관계를 두고 있던 상인들, 그리고 현지 플랜테이션 지주들은 그것에 강력히 반발했다. 서인도 플랜테이션 지주와 상인들은 공동으로 본국 하원에 청원을 제출했고, 셰필드에 대한 반론을 출판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경험과 현지의 정보를 근거로, 영국령 서인도 제도는 미국과의 자유로운 교역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령 서인도에 목재와 식료품의 유일한 공급원인 동시에 서인도산 당밀의 소비시장이었다. 목재와 식료품을 캐나다, 플로리다, 아일랜드, 본국으로부터 공급받을 수도 있다는 대안에 대해 그들은 대체지의 공급량이 불규칙적이고 운송비가 지나치게 높다는 근거로 맞받아쳤다.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는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공급받고 있었다. 서인도 제도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곡물은 유럽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들은 서인도 제도와 미국 사이의 자유로운 교역을 금지하는 것이 영국 정부가 독립전쟁의 원인을 여전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증거라고 역설했다. 빙엄(Bingham)의 의견을 빌리자면, 자유로운 교역의 금지는 영국과 미국을 갈라놓은 얼빠진 조언자들의 견해가 본국 내각에서 여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자유롭고 제한 없는 관계를 방해하는 장벽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셰필드가 제해권을 위해 서인도제도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상인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항해와 해군력은 상업의 모체가 아니라 그 행복한 결과들이다. 왜냐하면 농업과 제조업, 그리고 서로의 부족함이 멀리 떨어진 나라들 사이에 왕래할 구실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항해도 곧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항해를 진작시킬 생각으로 상업적 원천들을 희생하거나 탄압하는 것은 분명히 그것이 추구하는 목표 자체를 파괴해버릴 것이다. 해운업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실어 나를 만한 교역이 있다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들이 식민지들과의 더 자유로운 교역을 주장했던 것은 애덤 스미스 등 스코틀랜드 정치경제학자들의 견해를 빌려 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식민지 무역의 경험과 북아메리카 식민지 위기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합쳐진 결과였다. 이 상인 비평가들은 어쩌면 상업과 해군력 사이의 결정적인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아예 그러한 구분을 허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식민지를 국내의 잉여생산품을 판매하는 해외시장 중 한 곳이 아니라 제조업이나 어업과 같이 영국 경제의 특정한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본국과 식민지를 포괄한 영국은 그것이 영국민에게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다른 모든 관심사는 이 목표에 종속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셰필드의 견해는 영국의 이익과 경제적 이익을 분리하는 것이고, 이것은 상인들에게 영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매우 옳지 않은 견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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