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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위사(僞史)'의 계보 2007-11-04 23:48:38
金歷佛
※ 金歷佛 註 - 이 글은 하세가와 료이치 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것입니다. 金歷佛은 이 글의 논지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원문 보기


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위사(僞史)'의 계보*

- 일본인 기원론을 중심으로 -


하세가와 료이치(長谷川亮一)




"…… 비학문적인 소설이 반드시 무력한 이데올로기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비합리적인 논의가 도리어 그 비합리성을 위해서 논리가 아닌 심정에 호소하여 감각을 장악하고는 사람을 열광적으로 행동에 몰아넣으려 한다. 말하자면 과학의 상실과 신화의 재생이라는 문맥 속에서는 학문적으로는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억지 이론도 충분히 그 존재 이유가 발견되는 것이다." - 사이토 타카시(齊藤孝)1)


시작하며


메이지 이후의 근대 일본에서는 여러가지 형태로 기괴한 '역사'가 창작되어 왔다.

예를 들자면 이하와 같은 것이다. - 일본인의 선조는 백인이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源義経)와 징기스칸은 동일인물이다. 세계의 역사는 유태인이나 프리메이슨의 음모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즉위 이전에도 천황이 존재했다. 일본은 일찍이 전세계를 그 판도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등등.

이들 허구의 '역사' - '위사'는,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학문적인 역사학의 성과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정당하고도 충분한 학문적 검증이 부족한, 도저히 비판을 견딜 수 없는 듯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적지 않은 지지자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종래에 이들 '위사'에 대해서 역사학적인 견지에서 반드시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것도 일부 열광적 지지자에 의한 무비판적인 연구를 제외하면 종래의 연구는 그 내용의 잘못에 대한 비판이나 호사가적인 연구 단계에 머물렀고 '위사'의 내용이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별로 주의를 기울여 오지 않았던 것이 현상(現狀)이라고 말할 수 있다.2)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위사'는 그 비학문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지 않은 지지자를 얻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은 계속되어 현재도 여전히 '위사'의 확대 재생산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그 사회적 영향력이 결코 작다고는 말할 수 없다.3) 더군다나 전전(戰前)의 일본 역사학계·교육계를 최종적으로 지배하게 된 '황국사관(皇國史觀)'도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화를 역사로서 망신(妄信)함에 따라 성립한 '위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즉 '위사'가 일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사이토 타카시의 글에 있는 대로, 확실히 "비학문적인 소설이 반드시 무력한 이데올로기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위사'의 내용과 그 배경의 검증을 시도하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 '위사'는 그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그 대부분에 공통되는 경향으로서 일본 및 일본인의 '위대함'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려는 자민족지상주의적(ethnocentric)인 성격을 볼 수 있다. 또 일본인이 타민족보다 '우수하다'라고 주장하거나 혹은 외국의 토지가 일찌기 일본인의 것이었다고 하거나 하는 것에 의해서 일본의 대외 침략을 '위사'에 의해 정당화하려 한다, 와 같은 예도 보여진다.

특히 그러한 경향이 가장 현저하게 보이는 것이 일본과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위사'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 일본과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위사'를 중심으로 일본 근대에 있어서 '위사'가 어떻게 발생하여 유포되었는지를 검증해나가려 한다.


1. '위사'란 무엇인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위사(僞史)'에 대하여 정확한 정의를 내려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가짜 역사'로 이해할 경우, 그러면 '가짜'가 아닌 '진실의 역사'란 무엇인가, 또 '진실의 역사'가 아니면 모두 '위사'인가, 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정당한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른 학설이, 이후 새로운 사료의 발견에 의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을 경우, 그것을 곧바로 '위사'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위사'에 대하여 지금까지 이루어진 정의로서는,

"가짜 문헌에 의한 가짜 고대사" - 니시오카 후미히코(西岡文彦)4)
"날조에 의한 문서·유물이나 유사과학적 데이터에 근거한, 아카데미즘으로부터는 완전히 무시되는 학설" - 하라다 미노루(原田實)5)

등이 있지만, 모두 적절하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쌍방의 정의 모두 '위사'를 날조된 사료에 근거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다. 확실히 학설의 근거가 되는 사료가 위작이면 그 학설도 잘못된 것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료가 날조물이 아니어도 '위사'는 창조할 수 있고6), 반대로 사료가 날조물이어도 충분한 사료 비판을 가한 뒤라면 학문적인 역사학의 도마 위에 올리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점은 오히려 사료의 취급 방법에 있다고 생각된다.

또 소설과 같은 픽션류는 제외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전기소설(傳奇小說)' 등의 픽션을 '위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경향도 있지만7), 필자는 어디까지나 '위사'는 그 지지자에게 있어서 어디까지나 진실의 역사라고 생각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점에 입각하여, 필자로서는 '위사'의 범위를 가능한 한 넓게 잡아서,

"신뢰할 수 없는 논거(예: 사료 비판이 불충분한 사료, 사실 오인(誤認), 완전한 상상 등)를 토대로 비학문적인 방법론에 의해 짜맞추어진 허구의 역사"

로 일단의 정의를 해 두고 싶다.

또 그 실례(實例)로서는,

* 자민족 기원론(동조론(同祖論)) : 자민족의 출자(出自)를 타민족(보통, 고대 문명의 창시자 같은 '우수한' 민족인 경우가 많다)과 억지로 묶으려 하는 것. 또한 이 설(說)의 변종(variation)으로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징기스칸 설이나 그리스도=아리아인 설과 같은 역사상의 저명인을 자민족 출신으로 하는 설이 있다.

* 초고대 문명론 : 현대 문명을 훨씬 능가하는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 상당수는 그 고대 문명의 창설자를 자민족이나 그 선조로 한다.

* 음모론 : 세계의 역사는 누군가의 음모에 의해서 돌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설. 음모의 주역은 유태인이나 프리메이슨 등의 비밀 결사이다.

* 역사 수정론 : 역사적 사실로 되어 있는 것을 허구로 보거나, 역사적 사실에다 일반적인 해석과는 동떨어진 해석을 내리거나 하는 것. 예를 들면 독일에서의 이른바 '역사 수정주의자'에 의한 '아우슈비츠는 없었다' 설, 일본의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설, '종군위안부에 문제는 없다' 설 등을 들 수 있다.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2. 근대 일본의 '위사'의 역사


가짜 문헌이나 기교(奇矯)한 역사관, 혹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전설이나 역사 이야기와 같은 것은 고래(古來)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일본에 있어서 '위사', 특히 일본과 일본인의 기원론과 관련된 '위사'가 창작되어 나온 것은 근세 후반, 국학(國學) 사상이 성립했던 시기 이후로 생각된다. 또한 그것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근대 이후, 특히 타이쇼(大正) 이후부터 쇼와(昭和) 초기에 걸친 시기에 이를 구할 수 있다.

카사이 키요시(笠井潔)는 근대의 '위사'의 상상력의 배경으로서 "에도막부 말기의 창창종교(創唱宗敎)에서 유래한 근대의 신종교 운동"과 "근대의 세례 후의 '학문'적인 비사(秘史) 연구"라는 두 종류의 배경을 상정(想定)하고 있다.8) 이 두 종류의 배경은 두 가지 계통의 '위사'를 낳았다. 이하, 각각의 계통의 '위사'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 金歷佛 註 - 창창종교는 특별한 1인 혹은 집단에 의해 생겨난 종교. 가령 기독교(예수), 불교(싯다르타) 등이 있음. 원시종교, 일본 신도, 힌두교 등과 같이 자연 발생적인 종교는 자연종교.


2-1. '신대문자(神代文字)'와 '고사고전(古史古傳)'


우선 카사이가 말한 "에도막부 말기의 창창종교에서 유래한 근대의 신종교 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위사'의 계통에 대해 말한다.

이 계통의 '위사' 연구의 효시가 된 것으로서 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 1776-1843)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아츠타네는 주지하다시피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문하의 국학자인데, 『신자일문전』(神字日文傳/칸나히후미덴)「의자편」(疑字篇)9)과 그 외의 저작에서 '신대문자'의 실재(實在)를 그 실례를 들어 열심히 주장했다. '신대문자'란 한자 전래 이전에 일본에 이미 존재했다는 일본 고유의 문자인데, 실제로는 근세 이후의 위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지고 있다.10)

원래 국학이라는 사상 자체가 중국 문화의 일본 문화에 대한 영향을 배제하고 일본 독자적인 문화를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인지라, 중국 문화에의 대항 의식과 내셔널리즘이 그 배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신대문자'의 '발견'은 그 대항 의식이 실증주의의 틀을 넘어 '위사'의 세계로 비집고 들어가 버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덧붙여서, 아츠타네 등을 효시로 하는 '복고신도(復古神道)' 운동 또한 고대의 신도를 부활시킬 것으로 칭하면서도 그 실태는 새로운 종교의 창성(創成)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점에 있어서 '위사'적인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 '신대문자'로 쓰여진, 혹은 '신대문자'에 관한 전승 기록을 포함한 "고(古)" 문서가 그 후 속속 출현한다. 이러한 "고" 문서는 오늘날에는 '고사고전'11)이라 총칭되는 것이 많다.

대표적인 '고사고전'으로는,

『상기』(上記/우에츠후미, 별명 상진문(上津文)),
『궁하문헌』(宮下文獻/미야시타분켄, 별명 『부사문헌』(富士文獻)『서복문헌』(徐福文獻)),
『죽내문헌』(竹内文獻/타케우치분켄, 별명 『기원문서』(磯原文書)『천진교고문서』(天津敎古文書))
『구귀문헌』(九鬼文獻/쿠카미분켄)
『수진전』(秀眞傳/호츠마츠타에)
『화전가문서』(和田家文書/와다케분쇼, 『동일류외삼군지』(東日流外三郡誌) 외)

등이 있다.

그 내용에 관해서는, 신무천황 즉위 이전의 "신대(神代)"도 역사시대로서 취급하여 일본의 역사를 매우 장대한 것으로 하여 다루고 있는 것, 또 서술의 범위가 세계적 범위에 이르고 있는 것 등을 특징으로서 들 수 있다. 또한 그 대부분이 신도계(神道系) 신종교(新宗敎)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죽내문헌』 등과 같이 신종교의 경전으로서 공개된 것도 있다. 이들 '고사고전'은 모두 내력(來歷)이 불명확한 점이 많아서 근세·근대 이후의 위작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충분한 사료 비판이 되지 않고 있고12), 학계에서는 무시될 뿐인지라 한편으로는 열광적 지지자를 차츰차츰 낳고 있다, 라는 것이 현상(現狀)이다.

이들 '고사고전'의 내용은 출현시기가 내려올수록 다루는 시대는 올라가고 있다. 18세기말에 출현한 『수진전』은 전문이 '호츠마(秀眞/수진) 문자'라고 불리는 '신대문자'의 일종으로 쓰여져 있는데, 내용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천조대신)를 남신(男神)으로 하는 등,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화 이전의 범위를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한편 1838(天保9)년에 오이타(大分)의 국학자인 사치마츠 하에사카(幸松葉枝尺)가 발견했다고 하는 『상기』는, 전문이 역시 '토요쿠니신지(豊國新字/풍국신자)'라는 '신대문자'로 쓰여져 있는데, 신무천황 즉위 이전에 우가야후키아에즈(ウガヤフキアエズ) 왕조라는 왕조가 존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후지(富士/부사) 산록의 신사(神社)에서 전해지다 1883(明治16)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어 나왔다는 『궁하문헌』은, 진(秦)의 서복(徐福)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썼다는 설정으로 되어 있는데, 『상기』를 계승한 듯이 우가야후키아에즈 왕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문헌에서는 고천원(高天原/타카마가하라)은 후지산록에 실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출현한 '고사고전'은, 신무천황 이전의 왕조를 적는 등 일본의 역사를 과거로 끌어올리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꽤 황당무계한 부분이 있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가 '사실(史實)'로서 믿어졌던 것을 아울러 생각해보면 그토록 이상한 내용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것이 1920년대에 출현한 『죽내문헌』에서는 일변하여, "일본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었다"라는 과격한 주장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출현했던 시대의 차이도 있지만, 또 하나의 계통의 '위사'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2-2. '위사'적 일본인 기원론


다음으로, 카사이가 말한 또 하나의 계통인 "근대의 세례 후의 '학문'적인 비사(秘史) 연구"를 배경으로 하는 것에 관하여 말한다.

이 계통의 '연구'로서는 키무라 타카타로(木村鷹太郎, 1870-1931),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 1876-1956),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郎, 1867-1941), 사카이 카츠토키(酒井勝軍, 1874-1940)와 같은 사람들의 일본인 기원론에 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우선 먼저, 이런 종류의 '연구'의 효시이자, 또 대표적 존재인 키무라 타카타로의 연구에 대해서 말한다.13) 키무라는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의 소개나 『플라톤 전집』의 번역을 행한 것으로 알려진 철학자·번역가이며, 또 이노우에 테츠지로(井上哲次郎)나 타카야마 린지로(高山林次郎) 등과 함께 일본주의(日本主義)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저서인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世界的研究に基づける日本太古史, 전2권, 1911-12)14) 및 그 후의 일련의 저서에서 주장한 역사학은 대체로 기괴하다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키무라는 일본어와 그리스어나 라틴어, 일본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 이집트 신화, 『성서』 등의 유사점에 주목하여, 유사한 것은 모두 동일한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면, "이자나기노 미코토(伊邪那岐尊/이사나기존)는 희랍(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이며, 그 황천행 신화는 오르페우스 및 오디세우스의 황천행과 동일"15)과 같은 식이다. 마찬가지로 스사노오노 미코토(須佐之男尊/수좌지남존)는 페르세우스로,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사(Susa)의 건설자이며, 오오쿠니누시노 미코토(大國主命/대국주명)는 요셉이며, 야마토타케루노 미코토(日本武尊/일본무존)는 아폴론이다. 이리하여 키무라는 일본인의 선조가 고대 그리스인·고대 로마인·고대 이집트인이며, 이전에는 천황의 지배 아래 전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던 민족임을 '입증'한다.

키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일본어의 모든 것은 분명히, 오로지 희랍, 라틴(羅典)어이며, 결코 아마추어 학자 등이 말하는 남양(南洋), 아이누, 몽고, 조선 등에서 일본어원(日本語原)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일본인과 같은 우등 종족은, 만약 이를 다른 종족과 비교하려 한다면, 고래세계(古來世界)에 있어서 가장 우등한 민족이며 또 우등 문명의 창시자의 역사를 가진 민족과 비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희랍, 애급(이집트) 등의 고대 민족 및 세계 문명의 창시자와 비교하는 것이 가장 지당하다고 할 수 있다."16)

우선, 처음부터 일본인이 '우등 민족'이다, 라는 대전제가 있어서 그 근거를 '입증'하려 하고, 역시 '우수'해 보이는 타민족을 자민족의 선조로 한다. 그와 같은 결론을 처음부터 세운 다음, 그 후 지극히 자의적인 '논증'이 이루어진다.

키무라의 설 자체는 후계자를 얻지 못하지만, 이런 종류의 연구는 그 후로도 결코 사라지는 일 없이 오히려 연구자·지지자를 늘려 나간다. 그 주요한 것으로서는,

*히타이트설(이시카와 산시로 『고사기 신화의 신연구』(古事記神話の新研究) (1921))
*수메르설(미시마 아츠오(三島敦雄) 『천손 인종 6천년사의 연구』(天孫人種六千年史の研究) (1927))
*이집트설(토쿠마사 킨고(德政金吾) 『고대 애급과 일본』(古代埃及と日本) (1933))
*유태설(사에키 요시로(佐伯好郞) 『우즈마사를 논함』(太秦を論ず) (1908)),
            사카이 카츠토키(酒井勝軍) 『유태 민족의 대음모』(猶太民族の大陰謀) (1924),
            오야베 젠이치로17) 『일본 및 일본국민의 기원』(日本及日本国民之起源) (1929),
            나카타 쥬지(中田重治) 『성서에서 본 일본』(聖書より見たる日本) (1933),
            미무라 사부로(三村三郞) 『유태 문제와 뒤집어 본 일본역사』(ユダヤ問題と裏返して見た日本歴史) (1953),
            카와모리타 에이지(川守田英二) 『일본 히브리 시가의 연구』(日本ヘブル詩歌の研究) (1956), 그 외 다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마지막으로 제시한 유태설(일본=유태 동조론)은 가장 많은 지지자를 끌어모은 설로서 알려져18) 있는데, 그 논증은 예를 들면 그 가장 초기 논자의 한 사람인 사에키 요시로의 논(論)에서 보이듯이,

"(쿄토의 우즈마사의) "우즈"는 "Ishu" 즉 "Jesus"(예수), 또 "마사"는 "Messiah"(메시아)의 전와어(轉訛語)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람어 및 셈족어의 "예수·메시아"(Jesus, the Messiah)의 전와어에 다름 아니다."19)

와 같은, 언어유희적인 독단인 듯한 것이며, 도저히 학술적인 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듯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설이 거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일본인의 선조를 오리엔트 혹은 유럽의 고대 문명의 건설자인 '뛰어난' 백인계 인종에서 구하고 있는 점은 주의해 두어야 할 점일 것이다.

우선 '일본인은 우수하다'라는 근거 없는 의식이 선행하여 이 의식을 정당화하려 하고, 같은 '우수'한 민족을 일본인의 선조로 구하려 한다. 그 선조로 구해진 것이 백인계 인종인 것은, 구미(歐美)에 대한 심한 열등감과 그것을 자신의 선조를 구미인이라 함으로써 우월감으로 바꾸려 하는 발상의 표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키무라의 설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일본인이 일찌기 해외도 자신의 판도로 하고 있었다는 설은 일본의 대외 침략을 정당화 하려 한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러한 주장은 '위사'를 동원하지 않으면 정당화 할 수 없는 듯한, 근거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이 계통의 '위사'의 작자에 대하여

"위사의 고안자들은 결코 편협한 국수주의자는 아니었다. (중략) 청년 때부터 적극적으로 서양의 문물을 배운, 아카데미즘과는 무연(無緣)했지만 뛰어난 외국어를 구사하여 독학으로 인생을 마쳤다는 류의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20)

라고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키무라 타카타로를 비롯하여 이시카와 산시로는 아나키스트로서 저명하고, 오야베 젠이치로나 사카이 카츠토키, 나카타 쥬지 등은 미국 유학 경험을 가진 크리스챤인 등, 결코 편협한 국수주의자라고는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일견 모순되는 것 같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편협하고 무지한 국수주의자라면 단순히 황국사관으로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 일본의 실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식을 동원하여 이러한 기괴한 '위사'를 창작할 필요를 느낀 것은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일본 찬미를 정당화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된다.

이것이 쇼와 초기에 들어서면 더욱 도착(倒錯)된 논리가 탄생한다. 즉 일본인이 다른 모든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 라는 설이다. 즉 앞서 말한 『죽내문헌』이다.


3. 『죽내문헌』과 그 주변


『죽내문헌』은 교파신도계(敎派神道系) 신종교(新宗敎)인 '황조황태신궁천진교(皇祖皇太神宮天津敎)'의 교조(敎祖)인 타케우치 쿄마로(竹内巨麿, 1875?-1965)가 '신보(神寶)'로서 선조 대대로 내려왔다, 라고 칭하는 "고(古)"문서이며, 천진교의 경전적 존재이다.21)

※ 金歷佛 注 - 교파신도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당초 1922(大正11)년경부터 부분 공개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내용은 남조(南朝) 천황의 진필(眞筆)이라 칭하는 문서(「후제호천황어진필」(後醍醐天皇御眞筆), 「장경천황어진필」(長慶天皇御眞筆)) 등 비교적 얌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28(昭和3)년에 「신대문자신령보권」(神代文字神靈寶巻)이라는 것이 공개되자 상황은 일변한다. 그것은 전편(全篇)이 '신대문자'로 쓰여진, 황당무계의 극치라고도 말해야 할 '역사서'였다.

'연력무수(年歷無數)'의 과거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역사서'는, 일본이 전인류의 고향이며 일본의 천황은 신무천황의 즉위 이전에도 수백대, 수천억년에 걸쳐서 전세계에 군림하고 있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죽내문헌』에 의하면 석가, 모세, 그리스도, 무하마드 등은 모두 천황의 자손이며, 젊은 시절 일본에 유학하여 그 경험을 바탕으로 온 세계에 자신의 역사를 가르쳤다고 되어 있는 것이다.22)

전편이 '신대문자'로 쓰여져 있는 점, 신무천황 이전의 천황의 존재를 말하고 있는 점 등은 과거의 '고사고전'과 공통되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은 과거의 '고사고전'과 확연히 구분되고 있으므로 오히려 키무라 타카타로 등의 '연구'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또 구미의 아틀란티스 대륙설·무 대륙설로부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23)

여기서는 가장 도착된 형태의 자민족지상주의적 '위사'적 일본인 기원론을 찾아낼 수 있다. 다른 모든 민족이 일본인의 자손이라 함으로써 모든 인종·민족적 열등감이 불식된다. 그리고 일찌기 일본인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서술은 이른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정신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것이며, 따라서 일본의 침략전쟁행위를 완전히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위사'에서 그러한 행위의 근거를 구하는 것 자체가 그 행위의 무근거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15년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출현한 이 "고"문서는 바야흐로 일본의 대외 침략을 상징하는 내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고"문서는 그 황당무계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지지자를 얻게 된다. 사카이 카츠토키 등 일본=유태 동조론자(同祖論者)가 일본과 유태와의 관련을 나타내는 '증명'으로서 열렬한 지지를 한 것 외에도, 군인·국수주의자를 중심으로 폭넓은 층의 지지자가 나타난다. 천진교청(天津敎廳)을 방문하여 『죽내문헌』을 배관(拜觀)한 사람 중에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 등 적지 않은 장관·좌관급 군인의 이름이 보인다.24) 물론 배관자가 곧 지지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죽내문헌』이 군인들의 흥미를 널리 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36년, 카노 코키치(狩野亨吉, 1865-1942)25)는 유명한 「천진교 고문서 비판」(天津敎古文書の批判)26)을 발표, 『죽내문헌』을 철저히 비판하여 위서로 단정했다. 이러한 비판이 나타난 것 자체가 이 "고"문서가 많은 지지자를 모으고 있었던 것과 그에 대한 위기감이 퍼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카노의 비판은 『죽내문헌』을 보기 전부터 위서로 결정하고 있는 점, 불과 5매의 사진만으로 사료 비판을 실시하고 있는 점 등에서 다소의 의문점이 있지만, 비판 자체는 철저히 한 것이며, 『죽내문헌』이 사료 가치가 없는 위서임을 거의 완전하게 입증하고 있다27).

그런데 군(軍)을 중심으로 한 지지자의 증가에 위기감을 가진 경찰 당국은, 대본교(大本敎) 사건 등의 일련의 종교 탄압의 일환으로서 탄압의 화살을 천진교로 향한다. 경시청은 1930(昭和5)년에 타케우치 쿄마로를 사기죄 용의로 검거(제1차 천진교 사건), 이어서 1936(昭和11)년에는 마찬가지로 쿄마로를 불경죄·문서위조행사죄·사기죄 용의로 검거(제2차 천진교 사건)28). 덧붙여서 『죽내문헌』 자체는 제2차 사건으로 특고경찰(特高警察)에 압류되어 1945(昭和20)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소실되어 버렸다.

일본과 천황제를 찬미하여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는 내용임이 분명한 이 '위사'가, 왜 국가 권력에 의한 탄압을 받았는가. 요코야마 시게오(横山茂雄)는 나치=독일의 예와 비교하며 이하와 같이 지적한다.

"답은 천황제이다. 아리아=게르만 인종을 찬미하고 있는 한 터부가 적었던 독일과 비교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천황=야마토민족(大和民族)의 찬미는 언제나, 체제가 사수해야만 하는 천황제 그 자체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천황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죽내문헌』에 기재된 방대한 황통보(皇統譜)는, 체제측이 만든 만세일계(萬世一系)의 그것과 어긋남이 있어서, 그것은 반대로 체제측 황통보의 허구성을 조사(照射)하여 그 절대성을 흔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29)

'황국사관'은 다른 '위사'의 존재에 의해 위기에 노출되는 근거가 얄팍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위사'를 탄압해야 했던 '황국사관'은, 확실히 그 '위사'를 탄압한 것에 의해 자신의 허구성·'위사'성을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다.


4. 구미의 '위사' - 침몰대륙설


여기서 잠시 일본의 '위사'를 떠나서, 당시 구미에서 행해진 '위사'에 대해 - 아틀란티스 대륙설과 무 대륙설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30).

아틀란티스 대륙의 전설은 말할 것도 없이 플라톤의 『크리티아스』와 『티마이오스』에서 발단되었다. 1882년, 미국의 정치가 이그네이셔스 도넬리(Ignatius L. Donnelly 1831-1901)가 『아틀란티스』(Atlantis)를 간행, 이 책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의 문명이 세계의 전문명(全文明)의 근원이었다, 라는 설을 전개했다. 이후 아틀란티스 대륙의 연구에 일대 붐이 일어난다. 게다가 그 아류로서 인도양 또는 태평양에 일찌기 존재한 대륙, 레뮤리아 대륙에 관한 설도 등장했다.

1931년, 미국의 작가 제임스 처치워드(J. Churchward 1852-1936)가 『잃어버린 대륙 무』(The Lost Continent of Mu)31)를 발표, 태평양에 가라앉은 무 대륙이야말로 전인류와 전문명의 고향이라는 설을 전개했다. 그런데 처치워드의 무 대륙은 많이 인종차별적이다. "중심이 되고 있던 인종은 백인종"32)이며, 다른 인종은 백인종에게 예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처치워드에 국한되지 않고, 아틀란티스 대륙이나 레뮤리아 대륙의 실재를 주창하는 인간에게 공통되고 있다. 그들이 묘사하는 침몰 대륙은 대부분의 경우 전인류와 전문명의 고향이며, 게다가 그 땅의 주민의 지배층은 백인종으로, 자신의 선조였다 - 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설은 백인우월주의, 자민족지상주의(ethnocentrism)를 정당화 하여, 나아가서는 "이전에는 전세계가 자신의 것이었다"라는 것을 '입증'하여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짜내어진 '위사' 라고 말할 수 있다33).

이 침몰대륙설이 『죽내문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전인류와 전문명의 고향으로 여겨진 장소는 다르지만, 초고대에 그러한 문명이 있었다고 하는 점, 그 문명의 지배자를 자민족이라고 하는 점 등에서 양자는 아주 비슷하다. 이것은, 이런 종류의 '위사'의 사상이 결코 어떤 민족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자민족지상주의(ethnocentrism)를 정당화 하고 싶은 소망이 있을 경우 극히 자연스레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며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위사'란 현실의 세계와 역사에 대한 근거 없는 소망을 '현실'화·정당화 하기 위해 만들어져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근대의 일본에 있어서는, 그 소망은 첫째로 자민족지상주의적(ethnocentric)인 세계관의 정당화이며, 둘째로 대외 침략의 정당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소망도 확실한 근거를 지니지 않았고, 현실의 역사와 대조해보면 오히려 이러한 소망은 부정되어야 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인간이 현실의 역사를 개변하여 가공의 역사='위사'를 창작·날조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소망을 정당화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위사'의 근원이 이것이다, 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근대 일본에 있어서 이러한 근원으로부터 많은 '위사'가 만들어져 온 것은 확실하다.

따라서 '위사' 유행의 배경에는 이러한 소망이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위사'가 반드시 필요할 만큼 그만큼 근거 없는 소망이다, 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위사'는 예외적인 광기나 농담의 산물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민족지상주의(ethnocentrism)와 같은 근거 없는 소망이 퍼지고 있는 곳에서 극히 자연스럽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위사'를 일소에 부쳐버릴 진설(珍說)로만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주석


* 이 논문은 맨 처음에 치바대학 문학부 사학과 수업·역사학 기초연구로 제출한 리서치 논문인 「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위사'의 계보」(1996.12.25 제출)로서 집필하여, 후에 전면 개고하여 같은 사학과 수업인 도상정보사학개설II(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 교관)의 소논문인 「근대 일본 '위사'사 - 일본인 기원론을 중심으로 -」로서 제출한 것을, 이번에 홈페이지에 게재하기에 즈음하여 좀 더 손본 것이다.

원래의 논문은 나로서는 결코 회심의 결과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여러가지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았지만(여하튼 2, 3일 밤새워서 억지로 다 쓴 것이니……) 그에 비해서 평가가 몹시 높았기 때문에 이 홈페이지에 실어보기로 했다. [1997. 5.18- 5.19]

본 논문은 『계간 사마대국』(季刊 邪馬台国) 제65호(1998년 여름호=7월 25일 아즈사쇼인(梓書院) 발행), pp. 163-179.에 전재되었다. [ISSN 0387-818X]

1) 사이토 타카시(齊藤孝), 「신들의 부활」(神々の復活), 『역사평론』(歷史評論) 263호(1972/ 6), 아제쿠라 쇼보(校倉書房), 77페이지.

2) 본 논문의 주요한 선행 연구로는 이하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전반에 대해서,

나가야마 야스오(長山靖生), 『위사모험세계 - 컬트책 백년』(偽史冒険世界──カルト本の百年), 치쿠마 쇼보(筑摩書房), 1996.

주로 유태인에 관한 것에 대해서,

미야자와 마사노리(宮澤正典), 『증보 유태인 논고 - 일본에 있어서의 논의의 추적』(増補ユダヤ人論考──日本における論議の追跡), 신센샤(新泉社), 1982.

키무라 타카타로·오야베 젠이치로 등의 일본인 기원론(2-2 참조)에 대해서는,

하시카와 분조(橋川文三), 『황화 이야기』(黄禍物語), 치쿠마 쇼보(筑摩書房), 1973.
마츠야마 이와오(松山巖), 『소문의 원근법』(うわさの遠近法), 세이도샤(青土社), 1993.
오구마 에이지(小熊英二), 『단일민족신화의 기원 - <일본인>의 자화상의 계보』(単一民族神話の起源──〈日本人〉の自画像の系譜), 신요샤(新曜社), 1995.

가 각각 언급하고 있다.

'죽내문헌'을 비롯한 '고사고전'(2-1, 3 참조)에 대해서는,

타나카 카츠야(田中勝也), 『이단 일본 고대 사서의 수수께끼』(異端日本古代史書の謎), 다이와 쇼보(大和書房), 1986.
하라다 미노루(原田實), 『환상의 초고대사 - '죽내문헌'과 일본의 신화시대 역사 이론의 원류』(幻想の超古代史──「竹内文献」と神代史論の源流), 히효샤(批評社), 1989.
재팬·믹스 편(編), 『역사를 바꾼 위서』(歴史を変えた僞書), 재팬·믹스, 1996.

가 다루고 있다. 다만, 타나카·하라다의 두 책은 '고사고전'을 반드시 위서라고는 단정하고 있지 않다.

또,

요코야마 시게오(横山茂雄), 『성별된 육체 - 오컬트 인종론과 나치즘』(聖別された肉体──オカルト人種論とナチズム), 쇼시카제노바라(書肆風の薔薇), 1990.

에서는 나치=독일에 있어서의 위사와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주로 문학적 관점에서 '위사'를 취급한 것으로,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 『귀종과 전생』(貴種と轉生), 신초샤(新潮社), 1987.
카사이 키요시(笠井潔), 「위사의 창조력」(僞史の創造力), 『현대사상』(現代思想) 20권 4호(1992/ 4), 세이도샤(青土社).

가 있다.

3) 단적인 예로서 옴진리교의 예를 들 수있다. 옴진리교의 교단 내부에서는 유태=프리메이슨 음모론을 믿어온 것을 비롯하여 유아에게 "히틀러는 독일의 군인으로 훌륭한 사람. 죽은 것은 대역이고 지금도 살아있다"(『아사히 신문』(朝日新聞) 1995년 5월 14일 조간)라고 교육하는 등, 여러가지 '위사' 혹은 '위사'적인 것을 믿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위사'의 사회적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옴진리교와 '위사'를 연관지은 논고에는,

하라다 미노루(原田實), 「내가 만난 또 하나의 '카리스마' - 타케다 수겐과 오컬트 잡지 『무』의 궤적」(私が出会ったもうひとりの『カリスマ』──武田崇元とオカルト雑誌『ムー』の軌跡), 『타카라지마30』(宝島30) 3권 11호(1995/11), 타카라지마샤(宝島社).

등이 있다.

또, '위사'를 진정한 역사라고 주장하는 서적 가운데 현재 간행되고 있는 것의 일부는,

토학회(と學會) 편(編), 『엉터리 책의 세계』(トンデモ本の世界), 요센샤(洋泉社), 1995.
토학회(と學會) 편(編), 『엉터리 책의 역습』(トンデモ本の逆襲), 요센샤(洋泉社), 1996.

에서 소개되고 있다.

4) 니시오카 후미히코(西岡文彦) 저(著) / 아라마타 히로시(荒俣宏) 감수, 「위사란 무엇인가?」(偽史とは何か?), 『세계 신비학 사전』(世界神秘學事典), 히라카와 출판사(平河出版社), 1981, 485페이지.

5) 하라다, 전게 「내가 만난 또 하나의 '카리스마'」, 138페이지. 덧붙여서 나가야마, 전게서, 5페이지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6) 예를 들면, 『고사기』『일본서기』는 날조물이라고 할 수 없지만(『고사기』는 위서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불문한다), 그것을 기본으로 한 '황국사관'은 '위사'라고 할 수 있다.

7) 예를 들면, 요모타의 전게서와 카사이의 전게논문 등.

8) 카사이, 전게논문, 161페이지.

9) 히라타 아츠타네 전집 간행회(平田篤胤全集刊行会) 편(編), 『신수 히라타 아츠타네 전집』(新修平田篤胤全集) 제15권, 메이쵸 출판(名著出版), 1978에 수록.

10) '신대문자'에 대해서는,

나가야마, 전게서, 156-165페이지.
세계의 문자 연구회 편(編), 『세계의 문자의 도전』(世界の文字の図典), 요시카와 코분칸(吉川弘文館), 1993, 520-522페이지.
『일본사 대사전』(日本史大事典) 제3권, 헤이본샤(平凡社), 1993, 1452페이지.

외 각종 사전류를 참조.

'신대문자'의 문제점으로는,

1. 한자 유입 이전에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2. 만약 한자 유입 이전에 존재한 것이라면, 가나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3. 대부분의 경우, 음수(音數)가 47음내지 50음 밖에 없고, 현재보다 많았을 고대의 음운수(音韻數)와 맞지 않는다. 게다가 그 대부분은 일종의 단음문자(單音文字)이다. 명백하게 '이로하우타(いろは歌)'나 50음표의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4. 히라타 아츠타네가 언급한 '아비루 문자(アビル文字, 별명 '히후미(ヒフミ)')'와 같이, 명백하게 한글 문자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존재한다.

등과 같은 점이 많은 논자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좀더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발견'된 '신대문자'는 100종류 이상에 이르고 있어, 실제로 존재하여 사용되었다면 너무나 종류가 많다, 라는 문제점도 들 수 있다.

덧붙여서 '신대문자'의 실재론(實在論) 자체는 우라베 카네카타(卜部兼方)의 『석일본기』(釋日本紀) 등에도 언급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3~14세기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1) '고사고전'에 대해서는 1)에서 언급한 책 외에

『별책 역사독본 특별증간 14 '고사고전' 논쟁』(別冊歴史読本特別増刊14 「古史古伝」論争), 신진부츠오라이샤(新人物往来社), 1993.

을 참조. 덧붙여서 '고사고전'이라는 명칭은 아고우 키요히코(吾郷清彦)가

『고사기 이전의 책』(古事記以前の書), 타이리쿠 쇼보(大陸書房), 1972.

에서 제창, 사지 요시히코(佐治芳彦)가

『수수께끼의 죽내문서 - 일본은 세계의 지배자였다!』(謎の竹内文書──日本は世界の支配者だった!), 토쿠마 쇼텐(徳間書店, 1979)/토쿠마 분코(徳間文庫, 1996).

외 일련의 저작에서 정착시킨 것이라고 한다.(하라다 미노루(原田實), 「고사고전 Q&A」(古史古伝Q&A), 전게 『고사고전 논쟁』에 수록, 10페이지.)

12) 『죽내문헌』에 관해서는 후술하듯이 카노 코키치가 철저한 비판을 실시하고 있다. 또 전후(戰後) 1975(昭和50)년이 되어 출현한 『화전가문서』는 당초 자치체사(自治體史)의 일부로서 간행되었기(토시마 카츠조(豊島勝蔵) 편(編), 『시우라무라사 자료편』(市浦村史資料編, 전3권), 시우라무라(市浦村), 1975-77) 때문에, 한때 에도시대에 편찬된 사료로서 알려지고 있었지만,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 등에 의한 조사에서 현대인의 저작인 것이 판명되고 있다. 『화전가문서』에 대해서는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 편(編), 『동일류외삼군지 '위서'의 증명』(東日流外三郡誌「偽書」の証明), 코사이도 출판(廣済堂出版), 1994.
야스모토 비텐(安本美典), 『허망의 동북왕조 - 역사를 위조하는 사람들』(虚妄の東北王朝──歴史を贋造する人たち),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 1994.
사이토 류이치(齋藤隆一), 「미츠노쿠를 흔드는 『동일류외삼군지』 소동」(みちのくを揺るがす『東日流外三郡誌』騒動, 전게 『역사를 바꾼 위서』에 수록).

외 참조.

13) 키무라 타카타로에 대해서는

나가야마, 전게서, 80-83페이지·102-115페이지.
오구마, 전게서, 176-179페이지.
마츠야마, 전게서, 295-298페이지.

외 참조.

14) 하쿠분칸(博文館), 상권 1911/하권 1912.

15) 키무라 타카타로(木村鷹太郎) 원저(原著)/마츠자와 야스카즈(松沢保和) 교열(校閱)/야기리 토메오(八切止夫) 편(編), 『해양도래일본사』(海洋渡来日本史), 일본 셸 출판(日本シェル出版), 1981, 12페이지.

덧붙여서 이 책은 키무라의 『세계적 연구에 기초한 일본태고사』의 축약판인

『일본태고소사』(日本太古小史), 니쇼도(二松堂), 1913.

을 야기리가 일부 개찬 후 '복각'한 것이다.

16) 키무라, 『해양도래일본사』, 30페이지.

17) 오야베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는 징기스칸이다』(源義経は成吉思汗也), 후잔보(冨山房), 1924.

에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징기스칸 설을 제창하여 일약 유명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시츠네=징기스칸 설과 그 주변에 대해서는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 「요시츠네 입이 전설고」(義経入夷伝説考), 1914.
킨다이치 쿄스케(金田一京助), 「영웅불사전설의 견지에서」(英雄不死伝説の見地から), 1925.
(모두 킨다이치 쿄스케 전집 편집 위원회(金田一京助全集編集委員会) 편(編), 『킨다이치 쿄스케 전집 12권』, 산세이도(三省堂), 1993에 수록)
나가야마, 전게서, 9-50페이지.
마츠야마, 전게서, 278-289페이지.
키쿠치 이사오(菊池勇夫), 「요시츠네 『하이 정벌』 이야기의 탄생과 기능 - 요시츠네 입하 전설 비판」(義経『蝦夷征伐』物語の生誕と機能──義経入蝦伝説批判), 『사원』(史苑) 42권 1호(1982. 5), 호세이대학 사학회(法政大学史学会).

외 참조. 킨다이치는 이것을 단순한 '영웅불사전설'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다른 논자는 그게 아니라 그 배경으로서 일본인인 요시츠네=징기스칸이 일찌기 해외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전설을 만들어서 일본의 해외 침략 행위를 정당화 하려 했던 발상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 미야자와, 전게서 참조. 다만 유태 동조론은 일본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원래 유태의 '사라진 10부족'(보주(補註) 참조)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설이며, 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따라서 이 설의 배경에는 유태인측의 동류를 구하려는 소망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덧붙여서 쇼와 초기에는 유태 음모론이 꽤 유행했으나, 왠지 유태 음모론자 중에는 일본=유태 동조론을 동시에 신봉하는 사람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카츠토키(酒井勝軍)는 그 대표격으로, 『유태 민족의 대음모』(猶太民族の大陰謀)는 유태 음모론과 일본=유태 동조론이 뒤섞인 기괴한 저작이다(미야자와, 전게서, 70-76페이지). 덧붙여서 최근에도

『유태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ユダヤが分かると世界が見えてくる), 토쿠마 쇼텐(徳間書店), 1986.

에서 유태 음모론을 퍼트린 우노 마사미(宇野正美)가,

『고대 유태는 일본에 봉인되었다』(古代ユダヤは日本に封印された), 니혼분게이샤(日本文芸社), 1992.

에서 일본=유태 동조론을 주창한다, 와 같은 예를 볼 수 있다. 유태 음모론이나 그 외의 음모론에 대해서는,

『별책 타카라지마 233 음모가 가득!』(別冊宝島233 陰謀がいっぱい!), 타카라지마샤(宝島社), 1995.

참조.

(보주(補註)) 12의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유태인은 기원전 1000년경 다비드왕 아래 통일 왕국을 이룩했다. 하지만 다비드, 솔로몬 부자의 통치 후 기원전 920년경 왕국은 남북 분열. 북쪽의 10 부족은 이스라엘 왕국을, 남쪽의 2 부족은 유다 왕국을 세운다. 그런데 기원전 722년경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고 주민은 강제 이주를 당해 버린다. 이후 북쪽의 10부족은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것이 '사라진 10부족'인데, 실제로는 그들은 이민족 통치하에서 주변의 민족 등과 동화해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Robert Wauchope/핫토리 켄지(服部研二) 역, 『환상의 고대문명』(幻想の古代文明), 츄코우분코(中公文庫), 1988.

외 참조.

19) 미야자와, 전게서, 64-65페이지.

20) 요모타, 전게서, 115페이지.

21) 『죽내문헌』에 대해서는, 전게 『'고사고전' 논쟁』과 나가야마의 전게서 및 하라다 미노루의 논고(전게 『환상의 초고대사』와 「위서 『죽내문헌』과의 관련성」(偽書『竹内文献』との関連性, 전게 『동일류외삼군지 '위서'의 증명』에 수록) 및 「기서 『죽내문헌』 탄압과 2·26사건의 숨겨진 교차」(奇書『竹内文献』弾圧と二・二六事件の秘めれらた交差, 전게 『역사를 바꾼 위서』에 수록))를 참조.

덧붙여서 『죽내문헌』의 간행된 텍스트로서는,

타케우치 요시노미야(竹内義宮) 편(編), 『신대의 만국사』(神代の万国史), 황조황태신궁천진교(皇祖皇太神宮天津教), 1970.
오우치 요시사토(大内義郷) 편(編), 『신대비사사료집성』(神代秘史史料集成) 전3권, 하치만 쇼텐(八幡書店), 1984.

이 있다.

22) 또한 『죽내문헌』은 히로시마현의 '일본의 피라미드'나 아오모리현의 '일본의 그리스도 무덤', 결코 녹슬지 않는다는 금속인 '히히이로카네(ヒヒイロカネ)' 등, 고대사에 관계된 여러가지 기이한 이야기의 출원(出元)이 되고 있는 것도 알려져 있다.

23) 『죽내문헌』에는 미요이(ミヨイ)·타미아라(タミアラ)라는 침몰 대륙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아틀란티스 대륙과 무 대륙에서 힌트를 얻고 있다(후지노 나나호(藤野七穂), 「위사와 야망의 함몰 대륙」(偽史と野望の陥没大陸, 전게 『역사를 바꾼 위서』에 수록)). 그뿐만 아니라 전인류와 전문명의 발상지를 어떤 특정 장소에 구하여 그 땅의 지배자를 자민족으로 한다, 라는 발상 자체도 구미의 아틀란티스 대륙설과 유사하다. 이 점은 후술.

24) 나카무라 카즈히로(中村和裕), 「위사를 지지한 군인들」(偽史を支持した軍人たち, 전게 『'고사고전' 논쟁』에 수록, 173페이지).

25) 철학자·사상가. 교토제국대학 문과대학장.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발견자로서 알려져있다.

26) 카노 코키치(狩野亨吉), 「천진교 고문서 비판」(天津教古文書の批判), 『사상』(思想) 169호(1936. 6),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전게 『'고사고전' 논쟁』에 재록)

27) 카노가 언급한 주된 문제점은,

1. 다른 인물의 필적이라 일컬어지는 사료 사이에서도 동일 인물의 필적이 보인다.
2. 그 사료가 쓰여졌다고 여겨지는 시대의 관직 등급이나 제도에 대해 부정확한 기술이 있다.
3. 문법이나 가나 사용에 명백한 잘못이 있다.
4. 후세의 용어나 지식의 혼입이 있다.

등이다.(하라다 미노루의 정리(전게 「고사고전Q&A」)에 의함)

덧붙여서, 카노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죽내문헌』에서 세계 인류의 조상으로서 언급한 신(神)들 가운데에는 '요하네스부루구 청인민존(ヨハネスブルグ青人民尊)' '히우케에비로스 보스톤 적인신존(ヒウケエビロスボストン赤人神尊)' 등 실소를 자아내는 기술이 있으므로 이 문헌이 위서인 것 자체는 논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28) 1933년에 신보배관(神宝拝観) 정지 및 토리이(鳥居)의 철거를 명령받은 사건을 제2차 천진교 사건, 1936년의 사건을 제3차 사건이라고 부르는 계산 방법도 있다.

29) 요코야마, 전게서, 217페이지.

30) 아틀란티스 대륙설과 무 대륙설에 관해서는,

시미즈 가즈오(志水一夫), 「의혹의 인간 제임스 처치워드와 무 대륙전설·전」(疑惑の人ジェームズ=チャーチワードとムー大陸伝説・伝)
후지노 나나호(藤野七穂), 「위사와 야망의 함몰 대륙」(偽史と野望の陥没大陸)
(모두 전게 『역사를 바꾼 위서』에 수록)
요코야마, 전게서.
Charles J. Cazeau + Jr. Stuart D. Scott/시미즈 가즈오(志水一夫) 역, 『초고대사의 진상』(超古代史の真相), 도쿄 쇼세키(東京書籍), 1987.
Robert Wauchope/핫토리 켄지(服部研二) 역, 『환상의 고대문명』(幻想の古代文明), 츄코우분코(中公文庫), 1988.
Martin Gardner/이치바 야스오(市場泰男) 역, 『기묘한 논리 II』(奇妙な論理II), 겐다이코요분코(現代教養文庫), 1992

참조.

31) 국역: 코이즈미 겐타로(小泉源太郎) 역, 『잃어버린 무 대륙』(失われたムー大陸), 타이리쿠 쇼보(大陸書房)/1968, 타이리쿠 분코(大陸文庫)/1991, 타마 출판(たま出版)/1995. 다만 대폭적인 초역(抄譯)이다.

32) 전게 『잃어버린 무 대륙』, 타이리쿠 분코, 45페이지.
시미즈, 전게논문, 55페이지.

33) 또한 지난 1996년의 베스트셀러가 된

Graham Hancock/다이치 슌(大地舜) 역, 『신들의 지문』(神々の指紋), 쇼에이샤(翔泳社), 1996.

에서도 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

『신들의 지문』에서는 이집트·마야·잉카 등의 非백인계 고대문명은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선행한 초고대문명을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그 초고대문명을 전한 것은 '흰 피부의 인간'으로 되어있다. 게다가 그들이 문명을 이룩한 장소는 아틀란티스 대륙=남극 대륙이라 되어 있어 명백히 종래의 아틀란티스 대륙설의 영향을 받은 백인 우월감을 자아내는 발상이 배후에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일람


1. 연구서·논문

    * 斉藤孝「神々の復活」(『歴史評論』(校倉書房)263号(1972/ 6))
    * 長山靖生『偽史冒険世界──カルト本の百年』(筑摩書房/1996)
    * 宮沢正典『増補ユダヤ人論考──日本における論議の追跡』(新泉社/1982)
    * 橋川文三『黄禍物語』(筑摩書房/1973)
    * 松山巖『うわさの遠近法』(青土社/1993)
    * 小熊英二『単一民族神話の起源──〈日本人〉の自画像の系譜』(新曜社/1995)
    * 田中勝也『異端日本古代史書の謎』(大和書房/1986)
    * 原田実『幻想の超古代史──「竹内文献」と神代史論の源流』(批評社/1989)
    * 原田実「私が出会ったもうひとりの『カリスマ』──武田崇元とオカルト雑誌『ムー』の軌跡」(『宝島30』(宝島社)3巻11号(1995/11))
    * ジャパン・ミックス:編『歴史を変えた偽書』(ジャパン・ミックス/1996)
          o 志水一夫「疑惑の人ジェームズ=チャーチワードとムー大陸伝説・伝」
          o 藤野七穂「偽史と野望の陥没大陸」
          o 原田実「奇書『竹内文献』弾圧と二・二六事件の秘めれらた交差」
          o 齋藤隆一「みちのくを揺るがす『東日流外三郡誌』騒動」
    * 横山茂雄『聖別された肉体──オカルト人種論とナチズム』(書肆風の薔薇:発行/白馬書房:発売/1990)
    * 四方田犬彦『貴種と転生』(新潮社/1987)
    * 笠井潔「偽史の創造力」(『現代思想』(青土社)20巻4号(1992/ 4))
    * と学会:編『トンデモ本の世界』(洋泉社/1995)
    * と学会:編『トンデモ本の逆襲』(洋泉社/1996)
    * 『別冊歴史読本特別増刊14 「古史古伝」論争』(新人物往来社/1993)
          o 原田実「古史古伝Q&A」
          o 中村和裕「偽史を支持した軍人たち」
          o 狩野亨吉「天津教古文書の批判」(1936)
    * 安本美典:編『東日流外三郡誌「偽書」の証明』(廣済堂出版/1994)
          o 原田実「偽書『竹内文献』との関連性」
    * 安本美典『虚妄の東北王朝──歴史を贋造する人たち』(毎日新聞社/1994)
    * 金田一京助「義経入夷伝説考」(1914)(金田一京助全集編集委員会:編『金田一京助全集 12巻』(三省堂/1993)所収)
    * 金田一京助「英雄不死伝説の見地から」(1925)(同上)
    * 菊池勇夫「義経『蝦夷征伐』物語の生誕と機能──義経入蝦伝説批判」(『史苑』(法政大学史学会)42巻1号(1982/ 5))
    * 『別冊宝島233 陰謀がいっぱい!』(宝島社/1995)
    * チャールズ・J・カズー+スチュワート・D・スコットJr/志水一夫:訳『超古代史の真相』(東京書籍/1987)(原著1979)
    * ロバート・ウォーカップ/服部研二:訳『幻想の古代文明』(中公文庫/1988)(原著1962)
    * M・ガードナー/市場泰男:訳『奇妙な論理II』(現代教養文庫/1992)(原著1952)

2. 위사의 작자·신봉자의 저작

    * 平田篤胤「神字日文伝」(平田篤胤全集刊行会:編『新修平田篤胤全集』第15巻(名著出版/1978)所収)
    * 平田篤胤「疑字篇」(同上)
    * 木村鷹太郎『世界的研究に基づける日本太古史』(上/下)(博文館/上巻1911・下巻1912)
    * 木村鷹太郎:原著/松沢保和:校閲/八切止夫:編『海洋渡来日本史』(日本シェル出版/1981)(原著1913)
    * 小谷部全一郎『源義経は成吉思汗也』(冨山房/1924)
    * 佐治芳彦『謎の竹内文書──日本は世界の支配者だった!』(徳間文庫/1996)(初版1979)
    * ジェイムズ・チャーチワード/小泉源太郎:訳『失われたムー大陸』(大陸文庫/1991)(原著1931)
    * グラハム・ハンコック/大地舜:訳『神々の指紋』(上/下)(翔泳社/1996)

3. 사전류 외

    * 荒俣宏:監修『世界神秘学事典』(平河出版社/1981)
    * 世界の文字研究会:編『世界の文字の図典』(吉川弘文館/1993)
    * 『日本史大事典』第3巻(平凡社/1993)
    * 『朝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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