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金歷佛 註 - 金歷佛은 이 글의 논지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출처: 『국가와 혁명과 나』(1963)
5천 년의 역사는 개신(改新)되어야 한다
박정희
이병도 <국사대관(國史大觀)>의 서두에 다음의 글이 있다.
'사람의 고귀한 점은 문화의 창조와 진보에 있다. 문화의 창조와 진보는 자기의 과거를 회고하고 반성하고 비판하려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의 생활에는 원래 과오와 결점이 많다. 그러나 과오를 과오로, 결점을 결점으로 알아,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고 자기의 현실을 보다 나은 상태로 개선 향상하려는 데서 진보 발달이 생긴다. 여기서 위대한 문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류는 역사를 갖고 역사를 토대로 삼아 자기 보전, 자기 발전, 자기 완성의 길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회고·반성·비판할 때 무엇을 느끼게 되는 것인가.
역사를 정돈하고 위대한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정신적인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퇴영(退嬰)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連鎖史)
한무제(漢武帝) 동방 침략의 고조선시대에서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 정립 시대, 그리고 신라의 통일 시대를 거쳐 후백제, 후고구려, 신라의 후삼국 시대, 다시 통일 고려 시대에서 조선 5백 년에 이르는 우리의 반만년 역사는 한 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 할 것이다. 어느 한 시대에 변경을 넘어 타국을 지배하였으며 그 어디에 해외의 문물을 널리 구하여 민족 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일이 있었으며, 통일천하의 위세로써 민족국가의 위세를 밖으로 과시한 적이 있고, 특유한 산업과 문화로써 독자적인 자주성을 떨친 바가 있었던가. 언제나, 강대국에 밀리고 맹목적인 외래문화에 동화되거나 원시적인 산업의 범위 내에서 단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기껏하여 동포 상잔에 평온한 날이 없었을 뿐 아니라, 고식, 나태, 안일, 무사주의로 표현되는 소아병적인 봉건 사회의 한 축도판에 불과하였다.
이제 여기서 그와 같이 두드러진 우리 역사를 차분히 해부하여 보기로 하자.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역사의 과거를 회고하고 반성하고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문화와 진보를 이룩하려는 데 있다.
첫째, 우리의 역사는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자초지종 남에게 밀리고 거기에 기대어 살아 온 역사이다.
고조선 시대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봉령(封領)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도의 4군을 설치당한 데서부터 시작하여, 고구려·신라·백제의 삼국 시대에 있었던 수·당의 한민족의 침략, 당의 지원을 받은 신라의 통일과 고구려 유민의 발해국 창건 및 그 반목, 고려조에 있었던 거란(契丹)·몽골·왜구 등의 침입, 조선 중엽까지의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쳐 그 뒤의 청일 전쟁을 전후한 삼국의 간섭을 끝으로 일본의 단독 침탈로 마침내 대한제국이 종막을 고할 때까지 이 나라의 역사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이 외세의 강압과 정복의 반복 밑에 겨우 생활 아닌 생존을 연장하여 왔다.
그런데 딱한 일은 이 장구한 수난의 역정 속에서도, 단 한번도 형세를 반전하여 밖으로 밀고 나아가 국가의 실력을 펴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러한 침략은 반도라는 지역적인 운명이나 우리의 힘이 부족해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우리들이 불러들인 것이다.
또한 외세에 대하여 우리가 일치하여 대항한 적도 없었던 것은 아니나, 많은 경우에서는 적과 내통하고 부동하는 무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약자시하고 남을 강대시하는 비겁하고도 사대적인 사상, 이 고질, 이 나쁜 유산을 거부하고 뿌리뽑지 않고서는 자주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우리의 당파 상쟁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드물 만큼 소아병적이고 추잡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중세기까지 우리의 선조들은 비교적 활달하고 남성적인 기질이 있었으나, 조선에 들어오면서 점차 그 기상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불교에서 유교로 문물의 제도가 바뀜에 따라 그것은 급진적으로 민족의 자주적인 기개를 좀먹었다. 당쟁·파쟁은 참으로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음은 역사에서 우리가 자세히 알고 있는 터이다.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참으로 사소한 대립이 '동인·서인'으로 동인은 다시 '남인·북인'으로, 북인은 다시 '대북·소북'으로 대북은 다시 '육북·골북'으로 갈라지고, 소북은 별도로 '청소북과 탁소북'이 되고, 후에 와서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서인은 '청남·훈남·소남·노남'으로 분열되고, 노론 소론의 학파가 일어나고, '소론'은 다시 '벽파와 시파'로 갈라지는 등 참으로 어떤 계보가 어떻게 되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할 분열상이다.
이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굴러 왔는가. 그것은 여기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은 결국 이 당파 싸움에서 날이 새고 지다가 망국의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었다.
개신(改新)의 시점에 서서
'언(言)으로는 수(首)를 가고, 행(行)으로는 말(末)을 차지하면서, 거기다가 시비와 패거리라면 창자를 움켜쥐고 달려들었던' 이 고약한 유전을 우리는 이제 거부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소영웅주의적인 소인벽(小人癖)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국민적인 금도(襟度)나 대승적인 단합은 불가능한 것이다.
셋째, 우리는 자주, 주체 의식이 부족하였다.
우리의 파란 많던 역사의 그늘에서 정착할 수 없었던 문화·정치·사회는 마침내 '우리의 것'을 잃었고, 대신 '남의 것'을 우러러보게 되고, 거기에 영합하는 민족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전항에서 논급하였으므로 생략한다.
우리에게 다만 남아 있는 '우리의 것'은 '한글' 훈민정음밖에 다른 무엇이 뚜렷한가. 우리는 조속히 우리의 철학을 창조해야 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철학이나 문화는 민중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넷째, 경제 향상에 조금도 창의적인 의욕이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잠자고 있는 동안 세계는 재빨리 자국의 경제 향상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외 진출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기껏 앉아서 새끼나 꼬고 있었을 뿐이 아니었던가.
고려자기 등이 겨우 민족 문화재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것도 겨우 귀족들의 취미에 그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도중에서 명백히 끊어졌으니 답답한 일이다.
경제생활에 주가 된 것은 단지 농업 생산뿐이다.
'농(農)은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그것도 먹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면 이것마저 도중에서 폐지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우리는 이 같은 경제적인 국민성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경제 지상 관념에 입각할 수 없다면, 우리가 목표하는 강력한 민족국가 건설은 한갓 공염불에 불과하다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 민족사를 고찰하여 보면, 참으로 한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한 시대에는 세종대왕, 이 충무공 같은 만고의 성군, 성웅도 계시지만 전체적으로 돌이켜보면 다만 아연하고 막막할 따름이다.
우리가 진정 일대 민족의 중흥을 기하려면 우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역사는 전체적으로 개신(改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악의 창고 같은 우리의 역사는 차라리 불살라 버려야 옳은 것이다.
우리는 막연한 미련이나 허술한 역사의 연륜만을 자랑할 수는 없다.
대담한 새 출발이 있지 않으면 우리의 발전은 끝내 저해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대의 사명을 짊어진 우리들의 의무가 아닌가. |